매봉교회 ()

개신교
단체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의 교회.
이칭
이칭
유관순 기념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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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위치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의 교회.
개설

순국 열사 유관순을 배출하고 3·1운동 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교회로서 한국 기독교사만이 아니라 한국근대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 교회이다.

설립목적

미감리회 선교부와 초기 한국 개신교인들이 지역 복음화와 지역사회 봉사를 위해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01년에서 1907년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9년 3월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Wilbur C. Swearer)가 박해숙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의 전도활동으로 1901년경 목천 사자골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얼마 뒤 그곳에서 몇 리 떨어진 지령리에 세워진 교회가 매봉교회의 기원이다. 이후 1907년 8월 ‘대지령야소교당(大芝靈耶蘇敎堂)’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당시 동참한 인원은 82명이었다. 그해 11월 일본군은 의병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지령리교회당에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시켰다.

1908년 유관순의 일가였던 유빈기(柳斌基, 일명 柳聖配 1883~1928)와 숙부 유중무(柳重武)가 케이블(Elmer M. Cable) 선교사의 지원을 얻어 교회를 재건하였다.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도 이때부터 교회에 참여하였고, 1910년에는 진명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인들이 적극 참여하여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던 조인원과 유중무는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교회 출신 유관순도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1932년에는 교회의 존립이 어려워 총독부에 포교소 폐지계를 제출하고 교회 문을 닫았다. 1966년 이화여자고등학교가 창립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교회 복구 사업을 전개하여 이듬해 매봉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회당이 건립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뒤 교회 건물이 노후해지자 기독교대한감리회가 교단적 차원에서 교회 신축 사업을 전개하여 현재의 교회 건물이 탄생했다.

기능과 역할

교인을 대상으로 한 일주일 단위의 주일예배를 통해 교인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주기적인 3·1만세 운동 기념예배와 유관순 열사 추모예배를 통해 민족의식 함양에 힘쓰고 있다.

현황

교회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하 1층에는 유관순 열사 전시관, 1층에는 교육관과 사택, 2층에는 예배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담장 옆에는 유관순 열사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여느 농촌 교회와 마찬가지로 신자의 대부분이 노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인 수도 얼마 안 된다. 교회 간판은 ‘유관순 기념 기독교대한감리회 매봉교회’로 표기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한말의 국채보상운동 참여와 진명학교 건립, 그리고 3·1운동 당시 아우내 장터의 만세운동 주도를 통하여 한국 근대의 민족독립 운동에 기여한 교회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매봉교회가 낳은 민족의 보배 유관순』(홍석창, 신앙과지성사, 2014)
『대전·충남 지역 교회사 연구』(송현강,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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