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혁 ()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평양신학교 교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1년(고종 18)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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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평양신학교 교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교육가.
생애

188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어머니는 선교회에 소속된 전도부인이었다. 1901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벙커(D. A. Bunker) 선교사의 주선으로 인천세관 및 목포세관에서 근무하였다.

1906년 개신교에 입교한 뒤 세관원을 사임하고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08년 정신여학교 출신 김함라(金涵羅)와 혼인한 뒤, 1909년 광주숭일학교로 옮겼다. 1916년 광주북문안교회(光州北門內敎會, 현 광주제일교회와 광주양림교회) 제2대 장로로 추대되었고,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3·1운동 당시 자택을 모의장소로 제공한 이유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신학교 졸업 후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광주금정교회(光州錦町敎會, 현 광주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미국에 유학, 1922년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3학년생으로 편입하였다. 1년 만에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 1924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버지니아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년 과정만 마친 채 귀국하였으나 곧바로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29년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28년부터 『신학지남』의 편집장으로 활동했으며, 1932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9년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된 후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광복 직후 귀국하여 미군정청 적산관리처장으로 6개월간 활동하였으며, 1948년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에 취임하였다. 1950년 8월 공산군에 의해 납북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활동사항

주일학교 진흥운동에 힘써 주일학교 진흥부 전남노회 위원장과 주일학교 연합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조선주일학교대회 대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24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에서 열린 세계주일학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22년에는 『최신유년주일학교 교수법(Primary Method in the Church School)』을 번역, 출판하였다.

『신학지남』 편집장으로 활동하면서 칼럼 및 설교 수십 편과 성서강해 시리즈을 발표하였으며, 『게자씨』와 그 후속잡지인 『신앙세계』에도 요한복음 강해와 칼럼을 게재하였다. 1934년 ‘아빙돈 단권 주석(Abingdon 單券註釋)’ 사건 이후 『신학지남』 편집 실무를 그만두고 주필직만 유지하였다.

평가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이자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서 한국 기독교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신학의 광맥』(유동식, 다산글방, 2000)
「남궁혁의 신학사상 연구」(문백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남궁혁의 생애와 사상: 교회일치와 연합사상을 중심으로」(최원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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