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계통의 다양한 교육기관과 사회사업기관, 선교기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여성 지도자이다.
1888년 평안남도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김매륜(金邁倫), 아버지는 김종렬이다. 평양 정진(正進)학교와 이화학당을 잠시 거쳐 일본에 유학, 나가사키에 있는 갓스이[活水]여학교 영문과를 1909년에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10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교사로 잠시 일하였다. 그 후 정진학교 교사를 거쳐 동대문성경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15년 양주삼(梁柱三) 목사와 혼인하고 양매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3년 YWCA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27년 근우회 창설 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합동을 계기로 탄생한 기독교조선감리회의 총리사로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자, 남편의 바쁜 사역을 돕는 일에 주력하였다. 1931년 창립된 조선여선교회의 회계로도 활동했다.
1957년 종교교회의 장로로 선출되었고, 1961년에는 이화여자대학으로부터 종교계 및 여선교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다. 1962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개최된 부인연합회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양주삼의 장서를 연세대학교와 감리교신학대학에 기증하였다. 1980년에 별세하였다.
8·15광복 후 이화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를 비롯하여 감리교 총리원 이사, 기독교계 잡지 『새가정』의 운영위원, 기독교여선교연합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사재를 털어 감리교신학대학, 배화여자중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경민중고등학교 등에 장학회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자택을 건축헌금으로 내놓아 감리교 교단 차원의 ‘양주삼총리사기념예배당’ 건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한국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가 결성되었을 때 회장으로 선출되어 1960년까지 정부를 상대로 납북자 귀환을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