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립(金立)은 1880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익용(金益瑢)이고 이명으로 김립(金立), 김익용(金翼瑢, 金翼庸)을 사용하였고, 가명으로 옥진덕(玉鎭德)을 썼다. 자는 인삼(仁三), 호는 일세(一洗)이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다니며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김립은 서북학회와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 전에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를 기반으로 간민회를 설립하는 데 관여하였다. 김립은 국내의 계몽운동은 물론 북간도의 각종 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데 탁월한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1918년 한인사회당 창당을 주도하여 교통부장 연락책을 지냈다. 또 러시아 적위대와 연합 군사 활동을 하였고, 3 · 1운동 이후 한인사회당이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1919년 8월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로 이동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겸 서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임시정부의 공식 기관지 『공보』의 편집책임을 맡았다.
1920년 봄부터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였으며, 1921년 1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편하였고, 1921년 5월에 창당을 선언하였다. 모스크바 국제공산당에 한인사회당 대표를 파견하였으며, 한형권(韓馨權)을 임시정부 특사로 파견하여 모스크바로부터 차관을 얻어냈다.
그런데 ‘모스크바 자금 사건'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이동휘와 김립이 모스크바로부터 지원된 돈을 임시정부에 감추고 비밀리에 보관하였으며, 이동휘와 공모하여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자금으로 활용하였다고 알려졌는데, 임시정부 내의 정치 구도와 얽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김립은 이 사건으로 1922년 2월 10일 상하이의 파오통(Paotung) 거리에서 대낮에 한인 청년 오면직 · 노종균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들은 모스크바 자금을 소비에트 정부가 임시정부에 전한 공금이라고 생각하여 암살한 것이다.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중심 인물이 김립이 사망하면서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