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공산당은 1921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초대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취임하였다. 이동휘는 1920년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는데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주로 상해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그런데 1920년에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가 조직되었다. 전로고려공산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여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두 고려공산당은 조선혁명의 성격과 운동론에 대한 이견으로 대립하였다.
공산주의 이념 하에 조직된 단체이다. 한국인의 공산주의 운동은 레닌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기원적으로 발생하였다. 즉, 1918년 5월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고, 1920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지부인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가 조직되었다. 전자는 이동휘(李東輝), 후자는 김철훈(金哲勳)이 대표하였다.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모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데 두 조직의 체질상 차이는 전자가 서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면, 후자는 동부 시베리아의 귀화인 집단이라는 데에 있었다. 전자의 구실은 시베리아의 한인을 반일운동에 규합하는 일이었고, 후자는 서부 시베리아의 한인을 볼셰비키전선에 동원하는 일이었다.
1919년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동휘는 그 해 8월 말 상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동휘는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서 1920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이동휘의 심복인 박진순(朴鎭淳) · 김립(金立) · 이한영(李翰榮) 등의 한인사회당 간부를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 · 조완구(趙琬九) · 신채호(申采浩) · 안병찬(安秉瓚) · 이춘숙(李春塾) · 조동호(趙東祜) · 최창식(崔昌植) · 양헌(梁憲) · 선우혁(鮮于赫) · 윤기섭(尹琦燮) · 김두봉(金枓奉) 등의 임시정부관계자들을 가담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0년 12월 모스크바 자금을 상해로 운반해 온 김립이 이 돈을 임시정부에 주지 않고 비밀리에 보관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동휘의 위신이 크게 떨어져 임시정부 관계자들의 공산주의 그룹 이탈은 급속히 표면화되었다. 이동휘는 1921년 5월 10일 자파만의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모스크바 자금을 공산주의 운동에 사용하기로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또 공산주의 그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고, 그 달 23일 당의 임시 간장(簡章) 12개조, 당규율 5개조, 당정략 5개항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국내와 만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선언 및 강령규약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책임위원에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 · 이한영 · 김만겸(金萬謙) · 안병찬, 번역부위원 여운형, 출판부위원 조동호 등의 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이 당을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한편, 옴스크에서 1919년 11월 옴스크 공산당 고려족부가 결성되었고, 이르쿠츠그에서는 1920년 1월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가 조직되었다. 한인 사회주의운동을 관할하는 기능이 공산당 시베리아국 동방민족부 산하 고려부로 이전되면서 이르쿠츠크가 중심이 되었다. 이르쿠츠크공산당 고려부 지도부는 고문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이성(李成), 정치부장 한(韓)안드레이, 선전부장 최고려(崔高麗), 군정부장 오하묵(吳夏默), 교통부장 박(朴)이노겐치, 중앙위원 26명이다. 이 당은 시베리아의 이민족을 다루는 코민테른동양비서부의 수족이 되었다. 한인 청년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당원과 일반 주민에 대해서는 『경세종(警世鐘)』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정치사상교육 및 볼셰비키정책 침투에 힘썼다.
이 당은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 안의 고려공산단체 제1차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전로고려공산당으로 당명을 개칭하였다. 이후 1921년 5월 4∼17일에 한인공산주의자대회를 개최하고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이탈한 세력과 이르쿠츠크파 세력이 합작한 공산당이므로 종래의 전로고려공산당 간부는 모두 퇴진하고 안병찬 · 한명서(韓明瑞) · 남만춘(南滿春) · 한규선(韓圭善) · 이재복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3일 당지도부에는 위원장 김철훈, 비서장 한안드레이, 정치부장 이성, 선전부장 최고려, 군정위원장 오하묵, 교통부장 박이노겐치로 등 구간부들이 그대로 복귀하였다.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서로의 유일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레닌 집단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려는 투쟁 관계에 들어갔다. 상해파에서는 중국 및 일본 공산주의자들과의 제휴, 국내공작, 민족무장단 지원 등을 통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반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상해지부 설치, 상해고려공청 조직,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 장악 및 러시아 안의 한인볼셰비키화 공작 등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양파는 러시아 안의 한인군사조직을 둘러싸고 쟁탈전에 들어갔다. 1921년 6월 28일 수라셉흐카에서 상해파의 지원 하에 있는 사할린 의용대가 러시아적군에 가담한 이르쿠츠크파에 대항하다가 러시아적군 제29연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144명의 전사자 및 행방불명자를 내고 생존자 864명이 전원 붙잡히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를 세칭 자유시사변이라고 한다.
두 고려공산당의 분쟁의 배후에는 조선혁명의 성격과 운동론에 대한 뿌리 깊은 이견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 체제로부터 조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건설할 것을 제시했다. 즉 사회주의 혁명론에 입각한 소비에트 건설론에 공감하는 모든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을 결집하였다. 반면 상해파 고려공산당도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궁극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으나 이르쿠츠크파와는 달리 최고강령과 최저강령을 구분하고 있었다. 사회주의혁명에 선행하여 민족해방혁명을 수행할 것이며 곧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수립으로 성장, 진화할 것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괴롭혔던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분쟁은 자금, 권력, 군권을 둘러싼 단순한 패권 싸움이 아니라 혁명운동의 방법과 정책을 둘러싼 노선상의 대립의 표현이었다. 두 공산당이 자금과 권력, 군권을 놓고 다툰 것은 내분의 결과적 현상이지 그 진정한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대립은 정치적 이념을 통일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두 공산당이 1922년 상반기에 민족통일 전선 정책에 합의함으로써 고려공산당 통일운동을 전재한 것은 그 사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