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도(沿海道) 니콜스크-우수리스크군 타시마을 출생으로 그 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치타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한인정치망명객들의 잡지 『대한인정교보』에 관계하게 되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1912년 일본정부대표 가쓰라[桂太郞]가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갈 때 러시아 관헌에 붙잡혔다. 즉, 한인애국자들의 애국적 테러리즘을 예방하기 위한 조처였다.
1913년 연해도로 돌아와 시골학교 교사를 맡으면서 지하민족조직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0년 3월 알렉셈프스크에서 흑룡주(黑龍州) 한인총회가 조직되고, 동시에 군대모집에 착수하여 약 400명의 1개 대대를 단시일 내에 편성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 9월에 이르러 한인보병자유대대로 명명하게 되었다.
문창범(文昌範)을 의장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한족회의 후신)의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이 대대의 군정위원장으로 배치되었다. 대대장은 오하묵(吳夏默)이었다. 1920년 6월 러시아공산당원이 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제1차한인공산주의자대회에서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결성될 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만년에는 레닌이념의 선전에 투신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조선인학교를 위한 교과서편찬과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