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칭 남로당(南勞黨). 1945년 8월 16일이영(李英) · 정백(鄭栢) 등의 구 서울계와 안기성(安基成) · 이승엽(李承燁) · 조두원(趙斗元) 등의 구 화요계를 중심으로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같은 날 최익한(崔益翰) · 이우적(李友狄) · 하필원(河弼源) 등의 일본유학생출신 구 ML파는 따로 회합을 가지고, 또 하나의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양자는 거의 모두가 과거 조선공산당 운동선상에서 일찍이 탈락하여 청산파적 처지에 있었거나 전향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해당분자(解黨分子)들로서의 운명을 함께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두 개의 조선공산당으로 갈라져야 할 원칙적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곧 합동하여 하나의 조선공산당으로 진영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세칭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다.
1945년 8월 20일에는 박헌영(朴憲永)을 옹립하는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고, 지도자 박헌영을 비롯하여 김형선(金炯善) · 김삼룡(金三龍) · 이관술(李觀述) · 이현상(李鉉相) · 이주하(李舟河) · 김태준(金台俊) 등은 모두가 국내외에서 지조를 지켜 전향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통적 조선공산당이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해체되고 재건단계에 들어간 이래 그를 실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8 · 15광복의 합법사회가 도래하였다고 하더라도 몇몇 사람들만의 회합으로 별안간에 조선공산당 결성을 끝낼 것이 아니라, 일정한 당재건준비기간을 두고 국내외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식으로 당 건설에 착수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945년 8월 24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고 당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도권은 박헌영에게 넘어가, 그 해 9월 8일 최종적으로 개최된 장안파 열성자대회는 박헌영에게 조선공산당 재건과 당중앙건설에 대한 전권을 넘겨주었다.
그 달 11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재건을 선언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통일재건조선공산당’ 또는 ‘재건파 조선공산당’의 발족이었다.
한편, 1945년 10월 10일∼13일평양에서는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개최되었고,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김용범(金鎔範)이 그 분국의 책임비서(대리)로 선임되었다. 그때 소련군정은 김일성(金日成)을 북한점령지역의 소련이익대변자로 내세우고, 민족의 지도자로 우상화하는 정책과 함께 북한지역에 한한 공산당중앙을 만들어 김일성을 그 정상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오기섭(吳琪燮) · 정달헌(鄭達憲) 등 북한지역의 토착공산주의자들이 1국 1당 원칙을 완고히 내세워 서울에 통일재건조선공산당이 존재하는 한 평양에 별개의 조선공산당중앙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여, 평양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1945년 10월 23일서울의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는 평양의 북조선분국을 승인하였고, 이 분국은 그 해 12월 17일과 18일에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김일성을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하였다.
이로써 박헌영의 통일재건조선공산당은 국토분열에도 불구하고 1국 1당의 전일성(全一性)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조직체계상 박헌영의 지휘하에 들어가게 된 김일성 일파는 북한지역만의 조선공산당중앙을 고집하여, 공개회의의 결정을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부터 ‘북조선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북한에는 1국 2당의 공산당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북조선공산당은 같은 해 8월 28일∼30일에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과의 합당대회를 개최, 북조선노동당을 창립하고 서울의 조선공산당과는 독립적 존재로 되고 말았다. 이로써 통일재건조선공산당의 1국 1당적 전일성은 파괴되고 말았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은 이 당의 북조선분국이 어느새 북조선공산당으로 독립한 뒤 조선신민당과 합당하고 북조선노동당으로 새로이 발족하게 되자, 남한에서도 좌익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하여 여운형(呂運亨)이 당수로 있던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및 백남운(白南雲)이 당수로 있던 남조선신민당(南朝鮮新民黨)과의 3당 합당공작에 착수하였다.
1946년 9월 4일에는 3당 합동준비위원회 연석회의가 개최되었고, 합당결정서와 선언 및 강령이 채택되었으며, 남조선노동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3당 합동은 3당 내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근본적 원인은 공산당을 강화, 재편성하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과 관련한 급진적 합당추진파와 합리적 합당추진파 사이의 대립에 있었다.
결국,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과 그의 지지파는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는데, 남조선노동당은 1945년의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 1946년의 9월총파업사건과 10월폭동사건 등 조선공산당시대의 투쟁을 이어받아, 1947년의 3 · 1절 충돌사건, 8 · 15폭동, 1948년의 2 · 7총선방해투쟁, 4 · 3투쟁(제주도무장투쟁), 여수 · 순천반란사건, 1949년의 국회프락치사건 등 정치 · 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하여 파괴활동을 지속하다가, 대부분의 간부는 검거를 모면하기 위하여 북한으로 도피하였다.
남조선노동당은 1948년 8월 25일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하여 북한에서 제1차로 실시한 총선거 때 남한에서 연판장 형식으로 1,080명의 남한지역인민대표자대회 대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한 간접선거방식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360명의 남한 출신을 선출하였는데, 이 총선거는 남북한 인구 5만 명 당 1명의 대의원선거이었기 때문에 북한지역의 212명보다 다수가 되었다.
이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제1차 김일성내각에 남로당은 부수상 겸 외상으로 박헌영을 비롯하여 농림에 박문규(朴文圭), 사법에 이승엽, 노동에 허성택(許成澤), 보건에 이병남(李炳南) 등의 각료직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 밖에 최고인민회의의 의장에 허헌(許憲)이 됨으로써 수상 김일성의 지도체제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에 도피한 남로당원은 희망에 따라 북조선노동당(약칭 북로당)에 입당할 수 있게 됨으로써 시일이 경과됨에 따라 남로당세력은 감소되었고, 마침내 1949년 6월 평양에서 남북노동당의 합당조처가 취하여짐으로써 조선노동당의 명칭으로 일체화되었는데, 실제로는 북조선노동당체제에 남로당이 흡수, 해체되고 말았다.
종래 북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이던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이 되고, 박헌영은 복수부위원장제의 부위원장이 됨으로써, 광복 직후 통일재건조선공산당시대 때 양인의 상하관계는 완전히 전도되고 말았다.
이들 남로당 세력은 1953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최고재판소특별군사재판 때 이승엽 · 이강국(李康國) · 임화(林和) · 조일명(趙一明) · 박승원(朴勝源) · 배철(裵哲) · 설정식(薛貞植) · 맹종호(孟鐘鎬) · 조용복(趙鏞福) · 백형복(白亨福) 등 10명은 사형, 윤순달(尹淳達)과 이원조(李源朝)는 각각 15년과 12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남로당계 간부들은 김일성집단에 의하여 일소되고, 1955년 12월 15일 이들과는 격리된 최고군사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이 언도, 집행되었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간부들의 죄명은 일률적으로 정권전복음모와 미제국주의를 위한 간첩행위로 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당내에서 최강의 숙적인 박헌영과 그의 추종세력을 이와 같이 소탕함으로써 6 · 25전쟁의 패인을 남로당계의 간첩행위로 돌리는 일거양득의 이득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