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사방자(四方子)·뒤바보·북우(北愚). 함경남도 영흥 출신.
1908년 동경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북간도로 망명, 이동휘(李東輝)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북간도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상해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가을 시베리아로 들어가 이동휘의 정치적 거점인 다르뷰로에 부설된 한인부(韓人部) 5두제(五頭制)의 1인이 되는 등 노령 지역 한인사회주의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 코민테른에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동휘계의 고려공산당 상해파는 문창범(文昌範)을 영수로 하는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치열한 반목 관계에 있었다.
1921년 4월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도착, 제2차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이르쿠츠크 집단에 반대하는 사할린 의용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으로 말미암아, 박애, 장도정, 김진 등과 함께 1921년 5월경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5년, 제2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외교 활동에 힘입어 1921년 12월 출옥하였다.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계봉우 역시 이거,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만년을 보냈다. 계봉우의 무덤도 홍범도(洪範圖)의 묘소가 있는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있다.
저술로는 최초의 한말의병운동에 대한 종합적 서술이라 할 수 있는 「의병전(義兵傳)」이 있으며, 또한 노령 지역에서의 한인들의 생활상,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는 「북간도(北墾島)」·「아령실기(俄領實記)」·「김알렉산드라」 등이 있다.
이 글들은 1920년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연재했던 것들로 독립운동사연구에서 자료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동학당폭동(東學黨暴動)』·『조선역사(朝鮮歷史)』 등 역사 저술물도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