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교포 출신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러시아 이름은 파벨 니키포로비치이며, 출전에 따라 남만총(南萬聰)이라고도 불린다.
러시아 한인 사회에 잘 알려진, 초기 여성 사회주의자 남슈라의 친오빠다. 남만춘의 또 다른 여동생 남마리아는 몽골혁명정부의 고관을 지낸 어렌치노와 결혼했다.
1892년에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부유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인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 한인들 사이에 ‘사말니’라고 불리던 곳으로서, 한자로는 사만리(四萬里), 또는 사만리(沙滿里) 등으로 표기됐다.
그 곳은 한인 이주의 역사가 깊고 토지가 비옥하여 ‘천혜의 낙토’라는 일컬음을 받았다. 2,500명에 달하는 한인 주민들은 대다수 부농이었고, 러시아에 귀화했으며, 의복·음식 및 살림살이가 모두 러시아 풍속을 쫓았다고 한다.
고향에서 러시아식 초등 교육을 마쳤다. 1901년에 아무르주의 수도인 블라고베셴스크로 유학해, 러시아정교 신학교에 입학했다. 1908년에 신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자바이칼주의 수도인 치타로 가서 부친을 도와 군납업에 종사했다. 현지 주둔 러시아 군대에 채소를 납품했다고 한다.
1910년 중등학교(김나지움) 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에 편입했다. 재학 중에 차르 러시아에 반대하는 비밀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실로프, 브로체낀 등의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었으며, 치타역 철도 창고 파업 계획에도 간여했다. 1914년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러시아의 정규 초·중등 교육을 이수했기 때문에 남만춘은 세련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기 위해 키예프 의과대학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좌절되었다. 전쟁 발발 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었다. 남만춘은 사병이 아니라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징집과 동시에 사관학교에 입학해 단기 사관 양성 교육을 받고 1915년 2월 졸업했다.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임관해, 시베리아의 요충지인 옴스크로 파견되었다. 1916년 소위로 진급했다.
전쟁의 와중인 1917년 2월에 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른바 2월혁명이 그것이다. 혁명 직후에 군대 내에 결성된 소비에트에 참가하여, 연대 소비에트 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5월 제536연대 소속 1개 중대를 지휘하다가 전투 중 다리 부상을 입고 에카테린부르크로 후송되었다. 퇴원 뒤 잠시 장교식당 관리인을 지냈다. 그 해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발발했으며, 이듬해인 1918년 1월에 소집해제가 되어 귀향했다.
그 즈음 전 러시아가 내전에 휘말리자, 남만춘은 적군 편에 가담했다. 고향에서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에 종사하다가 백위파의 추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이주했다.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1920년 1월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현위원회 고려부 결성에 참여했다. 또한 한인과 중국인을 주축으로 하는 ‘합동민족부대(인떼르나찌오날 오뜨랴트)’를 편성해, 참모장을 지냈다. 이 부대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러시아내 소수민족 출신자들의 비정규 무장부대로서 백위군에 맞서 여러 차례 전투에 참전했다.
같은 해 3월 러시아공산당 이르쿠츠크 현당대회에서 현당 간부로 선출되었으며, 현당위원회 소수민족부장이 되었다. 7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고려공산단체 대표자대회에 참석했으며, 대회가 끝난 뒤 이 단체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은 같은 시기 상해에서 창립된 당과 구별짓기 위해 통상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라고 불린다. 이 당의 중앙위원 겸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로 선출되었고, 곧이어 열린 코민테른 3차대회에 출석해, 고려공산당을 대표해 연설했다.
그 해 가을에는 북경으로 파견되었다. 당의 조직 기반이 러시아에 한정되어 있음을 반성하고, 조선 국내와 중국내 한인 망명자들 속에 당세를 확장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경찰의 추적을 받아 위험에 처했으나, 만주를 거쳐 치타로 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 해 10월 베르흐네우진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했다. 이 대회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양당을 통합해 통일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소수파로 몰린 이르쿠츠크파는 대회장에서 퇴장해, 치타에서 별도의 당대회를 개최했다. 남만춘도 이에 참가했다.
1922년 12월 러시아내전이 종결되고, 이후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해 현지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23년에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소수민족부장으로 승진했다. 그 뒤 연해주공산당 집행위원 겸 혁명자후원회 회장,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벼재배전문학교 교장 등의 직위에 올랐고, 식민지 한국의 반일 혁명운동에도 참가했다.
1924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출석해 고려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말에는 코민테른 극동국 고려부원으로서 중국 상해로 파견되었다.
1927년 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출석해 「반제국주의통일전선」에 관한 정치테제를 보고했다. 이처럼 연해주, 상해, 만주를 무대로 하여 해외 망명지의 한인 사회주의 운동에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남만춘은 소련공산당 내부 알력의 한 희생자가 되었다. 1929년 소련공산당 숙청 시에 출당처분을 당한 바 있다. 그 뒤 다시 복당해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그러나 1933년 당 숙청 시 또다시 출당을 당하고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의 운명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36∼1938년경에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만춘의 저술로는 러시아어로 쓰인 정치논설 「오늘날의 조선」, 「조선농민의 상태와 농민운동」 등이 있다. 한글로 쓴 저술로는 『압박받는 고려』(극동도서출판사, 1925)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