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출신. 고등보통 학교를 마치고 교사로 근무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이르쿠츠크에서 군사학 과정을 마치고 소위보로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7년 2월(양력 3월) 러시아에서 혁명(세칭: 2월 혁명)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전선의 병사들에 의해 연대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큰 부상을 당해 종전 직전에 이등대위로 징집이 해제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직후인 1917년 10월(양력 11월) 러시아혁명[세칭: 대(大) 10월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모스크바 등과 달리 시베리아쪽은 여전히 차르(tsar)를 지지하는 잔존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더욱이, 미국·영국·일본 등은 시베리아지역의 이권을 염두에 두고 이들 잔존세력과 연합해 볼셰비키세력과 대립하였다. 이 때 오하묵은 조선인 자위대의 지휘관, 연합부대의 참모부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백위군 및 그 후원세력들과 싸웠다.
1920년 1월 22일 김철훈(金哲勳)과 함께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이르쿠츠크공산당 한인지부(이칭: 고려부)’를 조직하였다. 1920년 여름 블라고베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1920년 7월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을 조직하였다. 가을에 소총대대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자유시에 주둔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 들어 오하묵의 지위는 더욱 높아져서, 조선인 빨치산부대의 군사소비에트부의장, 조선인 빨치산부대 통합여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리고 오하묵은 볼셰비키혁명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초기 공산주의운동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1922년 가을 모스크바 최고군사교육기관인 프룬제군사아카데미에 입학해 군사학을 전공했으며, 수료 후 대령에 임명되었다. 이 후 레닌그라드 국제군사학교 조선과 창설을 위임받고 조선과 과장으로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