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충청북도 옥천 출생이다.
1908년 측량학교(測量學校)에 입학하고 1910년에 수료하였다. 이때 여운형(呂運亨)과 교우하여 함께 1914년 중국으로 망명, 난징[南京]에 있는 진링대학[金陵大學] 중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12년 7월 신규식(申圭植)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해 여운형·조소앙(趙素昻)·선우혁(鮮于爀)·신석우(申錫雨) 등과 이사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8년 8월 상해(上海)에서 여운형·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한진교(韓鎭敎) 등 5명과 같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고, 파리평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당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했을 때, 중국어에 능하여 중국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로서 연락을 담당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될 때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으며, 29명의 의원이 모인 임시의정원 제1차회의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19년 6월경 대한민국임시정부 내 설치된 임시사료조사편찬부(臨時史料調査編纂部)에서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광수(李光洙)·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발간된 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차이석(車利錫) 등과 함께 기자직을 맡았고, 신문제작을 위한 한글활자를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1921년 한중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 경제·상업·교육 방면에 대한 상호원조를 목적으로 상해의 프랑스 조계푸스로[浦石路] 14호에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해 조중구(趙重九)·오희원(吳熙元) 등과 교제과(交際科)의 간사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경 상해 샤페이로[霞飛路] 바오캉리[寶康里] 24호 조상섭(趙尙燮)의 집에서 이유필(李裕弼)·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오영선(吳永善)·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고 회계검사를 담당하였다.
1923년 말 귀국해 이듬해 동아일보사에 입사, 기자 겸 논설위원과 특파원으로 종군기를 집필하였다. 한편,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당의 강령과 규약을 기초하였다. 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활동하다가 1928년 2월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3년 3월 만기출옥해 『조선중앙일보』를 인수·간행하면서 무기명으로 항일논설을 집필·게재해 민족독립국가 달성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1944년 여운형 등과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내무부를 맡아 활동하다가, 1945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이석구(李錫玖) 등과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 폭탄의거가 일어나자 8월 4일 관철정(貫鐵町) 집회소에서 붙잡혀 투옥되었다가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1945년 8월 17일 제1차건국준비위원회가 여운형 등에 의해 조직되자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2005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