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이재복(李載馥). 김성삼(金成三), 이기창(李基昶), 이병휘(李秉徽), 이성(李聖), 이정(李檉), 이재봉(李在鳳)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함경북도 종성 출신.
어려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13년경 서울에 있는 상동(尙洞)청년학원을 졸업하고 1914년 동만주 지방으로 망명, 민족학교로 유명했던 창동학교(彰東學校)와 명동학교(明東學校) 교사를 지냈다.
1919년 11월 옴스크에서 열린 한인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기관지 『새벽북』의 발행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고려공산단체 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대회 의장으로 활약하였다.
대회에서 결성된 전로고려공산단체의 중앙위원장, 기관지 『경세종(警世鐘)』의 편집인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10월 옴스크에서 열린 제1차 전로고려인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고, 12월에는 전한공산당대회 소집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출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상해(上海)에서,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 조응순(趙應順)이 지도하는 결사대 성원에게 자유시사변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피습, 부상을 입었다. 1922년 치타에서 『노동자보』를 발간하였다.
1923년 코르뷰로(조선공산당 중앙총국) 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12월에 이동휘(李東輝), 정재달(鄭在達)과 함께 코르뷰로를 해체하고 당의 기초를 국내에 두자고 주장한 직후 코르뷰로에서 탈퇴하였다. 1924년 4월에 결성된 오르그뷰로(고려공산당 창립대회준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7월 국내에 들어왔다.
국내에서 각파 공산주의자 그룹의 지도자들과 협의, 통일된 조선공산당을 건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924년 9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27년 12월 출옥한 후 소련으로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