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숙(李春塾)은 1889년 6월 16일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났다. 호는 관오(觀吾), 이명은 이건(李健)이다. 서울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1918년 6월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였다.
1918년 7월 홍진의(洪震義, 이명 洪濤)와 함께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과 시베리아 지방 시찰 도중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에서 문창범(文昌範) · 윤해(尹海)를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다. 특히, 1919년 3 · 1운동 직후 평안도 지역에서 추진된 임시정부 ‘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의 내각 수립과 이 정부의 선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같은 해 4월 15일 평안북도 선천과 의주 일대에 「임시정부 선포문」과 「임시정부령」 1, 2호를 뿌려 ‘신한민국정부’의 수립을 널리 알렸다. 이춘숙은 신한민국정부의 재정부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4월 23일 한성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에서 국민대회가 준비될 때 신한민국정부의 「임시정부 선포문」과 「임시정부령」 1, 2호가 다시 서울 종로 일대에 뿌려졌다.
1919년 4월 말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초기에 국무원 위원, 임시의정원 법률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 4월까지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부의장, 군무차장(軍務次長) · 학무차장 등을 지내면서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 국채통칙(國債通則), 공채 발행 조례 등의 제정에 참여하는 한편, 1920년 11월 상해민단장(上海民團長) 여운형(呂運亨)이 발기한 신한문화동맹(新韓文化同盟) 등에 참가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경 상하이에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압송되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살이하였다. 출옥한 뒤 1927년부터 1931년 5월까지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총무간사, 1929년 7월 중앙상무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 조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