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은 1919년 3월 서울에서 3 · 1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붙잡혀 구류 처분을 받았다. 그 뒤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4월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이자 의회(국회) 기능을 수행하는 임시의정원 제3차 회의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임시정부 성립 초기에 임시의정원법을 통과시키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5년까지 약 7년 동안 임시정부 관련 기본법 등 기초 수립 활동과 조국 광복에 필요한 임시정부 각료의 선임 등 의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경 상하이 부근이 중국 내전으로 혼란해지고 임시정부의 위상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상하이 한인 교민들의 자치와 질서 유지, 임시정부 지원 등이 절실해졌다. 이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의 보호, 한인 교민들의 치안 유지 등을 위해 상해대한인거류민단 산하 조직으로 1923년 말 의경대(義警隊)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의경대에 참여하여 상하이 한인 사회의 자치와 치안에 힘쓰는 한편, 프랑스 관헌의 조계 경비를 돕는 등 프랑스 당국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무장투쟁 조직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4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후원 조직으로 대한청년동맹회가 결성되었는데, 후보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8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북경조선유학생회’를 조직하고 조사부 부장(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과 연계하여 한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한편, 베이징 일대에서 의열 투쟁 방략에 따른 무력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로 지목되어 체포 대상이 되었다. 1933년 6월 상하이에서 한인 단체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