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선(金榮璿)은 1878년 5월 4일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태어나 1910년대 초 남만주의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였다.
김영선은 1907년 안창호(安昌浩) · 김구(金九) · 이동녕(李東寧) · 신채호(申采浩) · 노백린(盧伯麟) ·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비밀 구국운동 조직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운동과 정치 · 경제 · 교육 · 문화 등 각 분야의 진흥을 위해 국내외를 연계하여 폭넓게 활동하였는데, 만주, 연해주 지역에 독립군 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과 연계하여 1910년대 초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만주) 서간도 지방으로 망명하였다.
1911년 10월 중국 남방의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 중화민국 군정부가 세워졌다. 신해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한 달 안에 중국 대부분의 성(省)에서 호응하였다. 결국, 1912년 1월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난징〔南京〕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지도 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출범하였다.
1912년 초 중국 둥베이 지방에도 신해혁명이 파급되면서 각 지방에서도 크게 호응하였다. 이때 김영선은 남만주 독립운동 지도자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서간도 지역 한인 청년 30여 명을 규합하여 1개 소대를 편성하였다. 그 뒤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으로 나아가서 중국 둥베이 지방의 신해혁명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 일로 중국 혁명정부의 훈장을 받았는데, 이후 중국 지방 당국과 중국인들의 한인 독립운동 지원에 큰 힘이 되었다.
김영선은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뒤 중국 옌볜〔延邊〕(북간도)과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북만주 하이린〔海林〕 지역에서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기성(基聖)학교에서 80여 명의 대종교 신도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며 대종교를 포교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 · 1운동이 일어나자 4월에 중국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4월 22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조성환(曺成煥) · 신철(申徹) · 박숭병(朴崇秉) · 김충일(金忠一) 등과 함께 군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무장 독립운동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