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묵은 일제강점기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경상도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대 베이징 일대에서 한인 민족운동과 의열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 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북(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3년 네이멍구 따뚱‧바오터우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정묵(金正默)은 1888년 12월 9일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생으로, 중국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하였다.
김정묵은 1918년 가족과 함께 북만주 펑텐〔奉天〕(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망명하여 베이징・상하이〔上海〕・펑텐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과 중국 국민정부의 군벌 장쉐량〔張學良〕 휘하에서 고위 장교인 군법처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에 광복회, 국민대표회의 베이징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 북경한교구락부(北京韓僑俱樂部), 북경한교동지회,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 한인애국단, 의열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 장인의 동문 이승희(李承熙)가 있는 중국 둥베이〔東北〕의 미산〔密山〕 한흥동(韓興洞)에 가서 독립운동 기지 개척에 종사하였다. 1914년 이승희가 공교회(孔敎會) 운동을 위해 베이징으로 가자 베이징에 유학하였다. 1914년 베이징의 법정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하여 4년간 근대 학문을 수학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중국 둥베이(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참여하였다. 김정묵은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여러 정책을 결정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였다. 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성정부, 대한국민의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직한 뒤 베이징으로 가서 신채호(申采浩) 등과 임시정부 비판과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 한인 교민 단합을 통한 독립운동의 진흥을 꾀하였다.
1925~1926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김창숙(金昌淑)의 ‘제2차 유림단의거’를 지원하였고, 1926년 ‘대독립당 조직 북경촉성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11월경 베이징에서 입적간민회(入籍墾民會)를 결성하고 만주 지역 한인의 중국 입적을 돕고,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중국 동북군 제19여단의 군법과장으로 입대한 뒤, 1931년 9월경까지 장쉐량 계통 부대의 ‘둥산성〔東三省〕 군법처장’으로 활동하며, 중국 동베이 지방(만주)의 한인과 한인 민족운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1931년 일본의 중국 둥베이 지방 침략 사태인 ‘만주사변(滿洲事變, 9 · 18사변)’ 이후 중국 동베이에서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1932~1933년경 김원봉(金元鳳)과 항일구국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러허〔熱河, 지금의 청더〕 지방에 중 · 한 항일전을 전개하기 위한 ‘한인의용군 사령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1932년 8월 이후 중국군사위원회 북평분회(北平分會, 약칭 군분회) 법무관 직위를 이용하여, 중국 국민당의 간부 및 군사위원들과 접촉하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와 뤄양군관학교의 개설과 학생 모집, 운영 등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한편, 의열단 단원으로도 활동하였는데, 1932년 6~7월경 김원봉 · 김규식 등이 중국인들의 항일 조직인 ‘북경구국항일회’와 제휴, 조직하여 한때 존속한 ‘중한항일의용군’의 지대 사령관을 맡기도 하였다. 즉, 의열단은 김원봉과 유기석‧김강암‧김세웅 등을 ‘동북구국항일회’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이 구국회는 베이징 부근의 러허성〔熱河省〕을 동북민중항일구국군 독립 제1지대 주둔구로 확정하고, 김정묵에게 지대 사령관 직책을 위임하였다.
중한항일의용군 산하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지청천(池靑天, 이청천)의 한국독립군 등 독립군 부대가 명의상으로 편제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북경항일구국회에서 독립지대 사령으로 임명된 김정묵을 러허 지방으로 파견하여 러허와 3∼4세기 중엽 만주의 랴오시〔遼西〕 지방의 중국구국군과 합작하여 활동하게 하는 한편, 이 지역의 한교의용군(韓僑義勇軍)을 제3총대로 편성하여 기존 동북의용군의 전력을 보강, 항일 전쟁을 수행한다는 원대한 계획이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중국 측의 일부 협조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김정묵은 1932년 중국군사위원회 북평분회의 법무관에 임명되었다. 북평분회는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국민당 정부 수반이었던 장제스〔蔣介石〕의 무저항 정책으로 사실상 만주를 일본 관동군에 내준 뒤 베이징으로 옮겨 온 장쉐량을 위해 1932년 8월 임시로 설치한 조직이었다. 장쉐량은 군사위원회 북평분회의 대리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정묵은 1930년대 초 베이징 지역 일대의 중국 국민당 정부 및 군사위원회 요인들과 연계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위상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베이징과 중국 화베이〔華北〕 지방 일대에서 만주사변 이후 대거 남하한 한인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중국 둥베이 및 국내, 그리고 중국 관내(關內) 요인들과 긴밀히 협력하였다. 특히, 의열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하던 중국 남부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한‧중 합작의 모색이나 펑위샹〔馮玉祥〕 등 중국 군벌 세력의 지원을 얻기 위해 분투하였다.
또 유기석(柳基錫)‧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1933년 6월경 중국 북쪽의 네이멍구〔內蒙〕 지방 따뚱(大同)‧바오터우〔包頭〕 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윤식(趙潤植, 전 장쉐량의 동북군 제3지대 사령관) 및 조선혁명당원 성인호(成仁鎬) 등과 함께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 조직을 결의하고, 중한호조회 주비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조윤식과 유기석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를 받기 위해 중국인 대표 2명과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당시 북평(현재 베이징)군사위원회 분회 위원장인 하응흠(何應欽)의 대리인을 만나 중한호조회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김정묵 등의 한 · 중 연대를 통한 항일 활동 전개는 무산되고 말았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