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申采浩)·김정묵(金正默)·박봉래(朴鳳來)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을 촉구하기 위해 발기한 단체이다. 1920년대 초, 만주와 노령에는 많은 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으나, 지휘계통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921년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10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북경(北京)에 모여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고,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단체의 지휘계통을 통일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총지휘부를 임시정부로 할 것인가, 별도의 군사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인가를 놓고 회의를 계속하였다.
회의 중 임시정부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있음이 확인되자, 군사통일주비회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불신임을 결의하고 임시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 때 군사통일주비회의 노선을 지지한 단체가 통일책진회이다.
발기인들은 「통일책진회발기취지서」를 작성해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첫째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하고, 둘째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시국을 수습하고, 셋째 군사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을 꾀한다.’로 되어 있다.
이 단체의 발기는 군사통일주비회의 움직임과 함께 이승만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를 태평양회의 참가를 구실로 상해를 떠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개혁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