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연(金甫淵)은 1886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1910년대 후반 중국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보연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의정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8월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1월 이 단체의 독립대대장(獨立隊隊長)이 되어 회원 모집과 독립 자금 모금에 노력하였다. 12월에는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 문제로 열린 유호임시국민대회(留滬臨時國民大會)의 발기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김보연은 1920년 1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2월 자신의 집에 회원 50명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유지사(有志社)를 세웠다. 임시정부의 위상과 진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를 둘러싼 여러 논의가 일어나자 1922년에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를 조직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6월 유호청년회가 주최한 연설회에서, 유호청년회는 국민대표회의에 반대하기 위해서 조직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당면 과제 해결과 대책 마련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주장하며 주위 사람들의 오해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 무렵 같은 황해도 출신인 김구(金九)와 긴밀히 협력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임시정부 경무국원으로 한인 밀정을 응징하는 등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보위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6년 7월 8일 상하이 삼일당(三一堂)에서 안창호 · 송병조(宋秉祚) · 한진교(韓鎭敎)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립과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목적으로 상하이 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안창호는 이 연설에서 “주의 여하를 불문하고 단합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각종 독립운동 조직과 각 정당을 통합한 ‘일대 혁명당’을 결성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후 중국 관내 지역과 둥베이〔東北〕 지역(만주)에서 이에 호응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김보연은 1926년 9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준비위원이 되어 회원 모집과 임시정부 활동 자금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김보연은 고향이 같은 김구와 함께 10여 년간 민족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하였다. 1928년 병사하였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