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2월 김구가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하여 한국특7무대 독립군과 별도로 난징〔南京〕의 동관두(東關頭) 23호에 학생훈련소를 설치하자 여기에 참여하였다. 약 30여 명의 한인 청년과 함께 훈련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학생훈련소는 난징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전에 지망 학생들을 대상으로 예비 군사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었다. 이후 중앙군관학교를 19기로 졸업한 뒤 1935년 8월 하순 김학무(金學武) · 이성황(李成煌) · 정성언(鄭成彦) 등이 조직한 사회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시월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난 뒤 중국 국민정부를 따라 중국 남부의 여러 도시를 유랑하였다. 임시정부는 1938년 11월 말 광시성〔廣西省〕 류저우〔柳州〕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2월 류저우에서 임시정부 산하 무장조직인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가 창설되었는데, 이때 김원영은 대원으로 참가하여 무장 독립전쟁에 동참하였다. 또 이 조직이 1939년 11월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였던 충칭〔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로 발전하였는데, 김원영은 이때도 대원으로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대 창설과 무력 투쟁에 참가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바탕으로 1940년 9월 임시정부의 정규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김원영은 중국 정부의 항공위원회 군관 학생이 되었다가, 다시 공군군관학교 15기 군관 학생으로 발탁되어 서남부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서 항공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4년 2월 인도에서 미군의 지원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45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 뒤 중국군 즈장공군기지〔芷江空軍基地〕의 중미혼합단(中美混合團) 공군 준위 견습관으로 배속되었다.
1945년 2월 7일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여 후난성〔湖南省〕의 웨양〔岳陽〕 · 헝양〔衡陽〕 등지에서 일본군 운수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3월 24일 일본군 공격을 위해 출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전투기가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