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정국광(鄭國光), 정경호(鄭京浩). 본적은 함경북도이다.
간도(間島)의 은진중학(恩眞中學)을 중퇴하였다. 김구(金九)의 추천으로 1934년 2월부터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서 수학했으며, 남경(南京)으로 돌아와 김구가 건립한 특무대 예비훈련소에서 1935년 2월부터 특무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8월 김학무(金學武) 등과 함께 공산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革命同志會, 10월회)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소련으로 들어가기 위해 상해(上海)로 갔다가 1935년 12월 일본 영사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여 만주로 갔으며, 1943년 화북조선독립동맹 공작원 이상조와 만나 만주에서 항일 지하활동을 함께 전개하였다.
해방 후 1945년 8월 20일 이상조와 함께 하얼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이 되었으며, 그 후 만주에서 1946년 6월부터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치처 주임을 맡았고 이어 조선인민주연맹 북만특위 주임을 역임하였다.
1946년 12월 말부터 1947년 2월 말까지 ‘북만지구 조선인간부훈련대대’에서 『신민주주의론』, 『사회발전사』 및 국내외 정치정세 등에 대해 강의하였다.
1947년 혹은 1948년경에 북한으로 귀국하여 이해 8월부터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그 이듬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9년 8월 조선중앙은행 이사장, 1962년 10월부터 1967년 11월까지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