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충칭 치장[綦江]에 도착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 대원들 중 이하유(李何有), 김동수(金東洙), 김인(金仁), 이재현(李在賢) 등이 충칭으로 가서 아나키스트 나월환(羅月煥), 박기성(朴基成) 등과 접촉하여 11월 11일 결성되었다.
창설 당시 대원은 30여 명이었다. 이들은 아나키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목표로 하였다. 결성 과정에서 김구(金九)의 승인을 받았지만, 임시정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창설 당시 부대의 대장은 나월환, 부대장은 김동수[일명 김강(金剛)]였으며, 정치조장은 이하유, 군사조장은 박기성[일명 구양군(歐陽軍)], 선전조장은 이재현[일명 이해평(李海平)]이었다. 대원은 조시제(趙時濟), 김원영(金元英), 현이평(玄以平), 송길집(宋吉潗), 엄익근(嚴益根), 김인(金仁) 등이 있었다. 이외에 맹조화(孟兆和), 평지성(平智盛), 금작생(金作生), 하상기(何尙祺) 등 중국인도 4명 있었다.
결성 직후인 1939년 11월 18일 충칭을 떠나 시안으로 이동하여 중국군 제34집단군 호종남(胡宗南) 부대와 연합하여 한국청년훈련반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중국군의 항일전투에 참여하고, 제34집단군 태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공작 활동을 펼쳤다.
적 점령구 내의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을 벌이고, 모집한 청년들을 시안으로 후송하여 한국청년훈련반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3개월간의 훈련을 마친 청년들은 중국군 소위로 임관되어 전지공작대 대원으로 편입되었다. 이를 통해 1940년 말에 이르면 대원은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광복군(光復軍)이 창설된 후,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하자 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개편되어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나월환이 지대장을 맡았다.
1942년 3월 1일 3 · 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제5지대 본부에서 나월환이 부하에게 피살되자, 일시적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편련처장(編練處長) 송호성(宋虎聲)이 후임 제5지대장을 맡았다.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는 제1 · 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기관지로 1940년 7월 창간한 『한국청년(韓國靑年)』이 중국어로 간행되어 항일활동을 소개하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