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통(故事通)』은 1943년에 육당 최남선이 문화교류사의 관점에서 간행한 한국통사이다. 한국의 역사를 문화와 문화 교류의 관점에서 정리하여 한국 문화의 가치를 높였다는 의의가 있지만, 결국 한국과 일본 문화의 혼용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0년대 통사 작업을 시작한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1928년 『 조선역사강화(朝鮮歷史講話)』 집필을 완성해 1930년 『 동아일보』에 연재했다가 1931년 단행본 『조선역사(朝鮮歷史)』로 출판하였다. 『조선역사강화』가 완성되던 1928년 10월 8일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고, 12월 20일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일문화동원론(韓日文化同原論)을 제기하며 친일의 길을 걸어, 1938년 『 조선사(朝鮮史)』 37권의 편찬이 완료되자 중추원 참의가 되었다. 1939년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였고, 1943년 11월에는 이광수와 함께 동경으로 가서 학도병 지원 연설을 하였다.
1930년대 내내 조선의 역사를 연구해 온 최남선은 학도병 지원 연설을 가기 한 달 전인 1943년 10월 『고사통』을 출간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는 셈 치고’ 이 책을 출판한다고 했지만, 이 책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최남선의 친일 경력이 작용하였다.
당시는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집필을 단념하고 은둔해 있을 만큼 황민화 정책이 극에 달해 있어 ‘조선 역사’라는 말조차 쓰지 못하고 ‘고사통’이란 제목을 달아야 하였다. 『고사통』은 당시 한국어로 출간된 유일한 한국 역사서로, 발간 석 달만에 3만 부가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고사통』은 『조선역사강화』를 토대로 구성되었지만, 구성 체재와 역사 인식에서 『조선역사강화』와 궤를 달리하는 통사이다.
1943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가 일제에 함락된 것을 기념하여 출판한다고 밝힌 서문에서는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가 필요하다고 하며, 대동아전쟁의 시대이므로 골격과 사료에서 일대 변통을 하겠다고 하였다. 실제로 『고사통』은 『조선역사강화』를 문화사 중심으로 대폭 변화시켰다.
『고사통』은 『조선역사강화』의 두 배 분량으로 100장 300절로 구성되었다. 『조선역사강화』보다 추가된 장은 시대로는 고려와 조선에 집중되어 있고, 내용으로는 대부분 문화와 문화 교류에 관한 사항들이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지역의 인적 교류, 문물 교류에 관한 장들을 집중적으로 추가하였다.
중국과 북방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유구, 서역, 포르투갈, 스페인, 아라비아, 태국 등과의 인적 교류 내용도 포함되었다. 전 시대를 통해 한국 문화와 세계 문화의 교류, 즉 한국 문화가 세계 문화에 미친 영향과 세계 문화가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세계적 문물 교류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고려는 『조선역사강화』에서는 가장 폄하되었지만, 『고사통』에서는 문화 교류사적 입장에서 가장 크게 평가되었다.
원 지배기의 문화 교류 역시 크게 평가하여 원을 통해 들어온 아라비아 문물이 조선 전기 세종조 문화를 일군 바탕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근세에도 문화 교류사적인 서술이 많아졌는데, 임진왜란도 한일 문화 교류와 동서 문화 교류의 통로로 평가하였다.
『고사통』은 『조선역사강화』의 용어와 내용을 많이 바꾸었다. ‘민족의 자각’을 ‘삼국의 정립’으로 바꾸고, ‘왜구(倭寇)’도 ‘해구(海寇)’로 바꾸었다. 근대 계몽운동의 반일 투쟁을 서술한 ‘민간의 신운동’을 ‘문화운동’으로 바꾸고 ‘국채보상운동’을 ‘문학과 종교’로 대체하였다. 근대의 항일 투쟁에 관한 서술은 모두 삭제되었다.
『고사통』은 한국 문화의 가치를 높여 세계 문화에 기여한 사실을 누누이 강조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최남선이 1930년에 제기한 한일문화동원론을 한국 역사 전 시대로 확장시키면서 결국 한국과 일본 문화의 혼용을 추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가운데 민족주의는 퇴색하였다. 이는 문화를 민족보다 앞세웠던 최남선 사학이 식민지 시기에 이른 마지막 지점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