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원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임실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인으로 1919년 3 · 1운동 당시 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데 앞장섰다. 3월 12일 임실 장날 독립만세시위의 토대가 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의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서울의 3 · 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는 바로 다음날 천도교 전주교구실을 통해 임실교구실에 도착하였다. 천도교 임실교구장 한영태(韓榮泰)는 곧바로 3 · 1운동 소식을 전하고, 군내 각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한영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은 운암면(雲岩面) 지천리(芝川里)의 천도교 전교사 한준석(韓俊錫)은 3월 2일 정오경 지천리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인인 김영원에게 독립선언서 20매를 교부하였다.
김영원은 그날 밤 바로 운암면의 입석리(立石里), 선거리(仙居里), 학산리(鶴山里) 등의 장소에 게시하여 3 · 1운동 소식을 널리 알렸다. 그날 밤 자정을 기하여 운암면의 국사봉과 청웅면 백련산, 덕치면 회문산, 삼계면 원통산, 성수면 성수산, 신덕면 치마산 등에서 올린 봉화를 신호로 임실군내 각지에 선언서가 뿌려지고 독립만세가 외쳐졌다. 이런 움직임은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토대가 되었다.
김영원은 이후 체포되어, 1919년 4월 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기각으로 징역 1년이 유지되었다.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8월 26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