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辛鐵)은 1901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어려서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이명은 신용기(辛容箕)이다. 양정고등보통학교(양정고등학교의 전신)를 중퇴하고 지린성〔吉林星〕으로 이주하여 지린성립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4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르쿠츠크군정학교를 졸업하였다.
코르뷰로의 국내 공작원으로 1923년 3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다. 김재봉(金在鳳)과 더불어 신백우(申伯雨) · 윤덕병(尹德炳) · 이영(李英) 등 국내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회동하면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해 6월 김약수(金若水) · 김재봉 · 김찬(金燦) · 신백우 · 이봉수(李鳳洙) 등 서울파를 제외한 화요파와 북풍파를 중심으로 코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였다. 이때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같은 해 9월 경상남도 지역에서 순회강연 중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10월에 방면되었다.
1924년 2월 박헌영(朴憲永) · 김단야(金丹冶) · 임원근(林元根) 등과 함께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3월 사보타주(sabotage) 혐의로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4월 김약수 등과 까엔당이라는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한 후, 합법 기관으로 건설사를 조직하였다. 이후 7월에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11월에는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0월에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문제에 대한 북풍파의 의견을 제출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1926년 2월 김영우와 함께 코민테른에 북풍파의 입장을 정리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종파 행위로 간주되어 조선공산당에서 권한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45년 11월 여운형(呂運亨)이 이끄는 조선인민당 조직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