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金燦)은 189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경원(慶源), 종성(鍾城) 군수를 지냈다. 성진의 중화중학교(中化中學校)와 명천의 진성중학교(進成中學校)를 거쳐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서울로 올라와 경성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912년 경성의학강습소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같은 해 8월 일본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휴학하였다.
중국 간도로 가서 국자가(局子街, 옌지〔延吉〕) 도립중학(道立中學)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이후 도쿄로 가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1919년 4월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였으나, 다시 중퇴하였다. 경남철도회사에 근무하면서 야간에 주오대학〔中央大學〕 경제과에서 수학하였다.
자유협회 등 도쿄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교유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수용하였다. 1920년 9월 이르쿠츠크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를 방문하여 보이틴스키 등 동양비서부 간부 및 김철훈(金哲勳) 등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교유하였다. 도쿄로 돌아와 1921년 12월 흑도회 결성에 참가하였다.
1923년 서울로 귀국하여 고려총국 국내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7월 신사상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4월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1월 신사상연구회가 화요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이 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발생하자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과 후계 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12월 일제의 체포를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함께 망명한 김단야(金丹冶)‧ 조봉암(曺奉岩) 등과 조선공산당 임시상하이부를 조직해 책임자가 되었다.
국내의 조선공산당과 연락하며, 1926년 6 · 10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상하이에 코민테른 극동부가 설치되자 임시상하이부를 해체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서울파가 대거 입당하여 12월 개최된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와 신규 조선공산당 지도부에 대해 사전 보고가 없었고 규율 위반이라며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까지 방문하여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승인을 방해하였다.
1927년 7월 북만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는데, 10월 ‘제1차 간도 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붕괴하자 조직의 재건을 주도하였다. 북만주에서 조선인농민조합 결성 및 북만조선청년총동맹 결성을 주도하고 신민부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1928년 9월 지린〔吉林〕에서 정의부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1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무임간부로 선임되었고, 1929년 2월 남만조선인청년총동맹 결성에 관여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민족유일당협의회와 전민족유일당촉성회로 분열되자 정의부 다수파가 참여한 협의회 진영에 참여하였다. 1929년 1월 지리에서 열린 민족유일당조직동맹 제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주석단에 선임되었고, 4월 국민부 결성 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ML파 계열 청년 단체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6월 만주총국이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비판하는 결정에 거부하고 당내 소수파가 되었고, 12월 만주총국 간부직에서 해임되었다.
김찬은 일국일당 원칙에 따른 재만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 입당도 반대하였고, 리리싼〔李立三〕 노선에 따른 무장 폭동도 반대하였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의 좌경화에 맞추어 국민부도 우경화 노선을 강화하고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였는데, 그 결과 9월 국민부 제1 중앙의회 회의에서 중앙집행위원직에서 해임당하였다.
1930년 1월 지린에서 서울 상하이파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가 되어 민족주의자 김동삼(金東三)을 위원장으로 결성한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在滿韓人反帝國主義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재무부장 겸 정치부 부원이 되었다. 그러나 조직이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해체되자 아성현(阿城縣) 해구(海溝)에서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국내로 입국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가 1931년 4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1939년 출소하였다.
8 · 15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1947년 3월 이극로(李克魯)를 위원장으로 한 민주주의독립전선 결성에 조봉암 등과 함께 참여해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5월 중간파 미소공위대책각정당사회단체협의회(美蘇共委對策各政黨社會團體協議會) 결성에 참여해 총무부장에 선임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용산 갑구에 입후보하였다가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사건’에 연루되어 불구속 기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