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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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이칭
이칭
신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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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4년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단체.
내용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가 개칭되어 성립된 단체로, 신사상연구회는 1923년 7월 7일 서울 낙원동에서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구연흠(具然欽)·박일병(朴一秉) 등이 발기인이 되고, 윤덕병(尹德炳)·김병희(金炳僖)·이재성(李載誠)·이승복(李昇馥)·조규수(趙奎洙)·이준태(李준(準)泰)·강상조(姜相照)·홍덕유(洪悳裕)·원우관(元友觀)·박돈서(朴敦緖)·김찬(金燦)·김홍작(金鴻爵)·김재봉(金在鳳)·권오설(權五卨)·안기성(安基成)·이봉수(李鳳洙)·김경재(金璟載) 등이 신사상을 연구하려는 목적으로 조직했다.

일종의 학술연구단체로 강습과 토론회를 실시하고 이론서적 및 잡지를 간행할 것을 당면사업으로 내세웠다.

1924년 11월 19일 신사상연구회 간부회는 명칭을 ‘화요회’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할 것을 결의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되었다.

화요회는 1925년 4월 17일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립에 주도적인 활동을 했으며, 이 단체의 김찬·김재봉·윤덕병·홍덕유 등이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김재봉은 제1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김찬은 화요회와 조선공산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노령(露領)에서 돌아와 신사상연구회에 참여할 때부터 ‘조선공산당 창립’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김재봉은 레닌(Vladimir Lenin) 집단의 비호를 받아온 이르쿠츠크공산당에 가입해 이와 연계를 가지면서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반면, 김찬은 독자적으로 실행하려 했다.

또한 이르쿠츠크파로 뒤늦게 집행위원이 되었던 조봉암(曺奉岩), 상해(上海)에서 돌아온 후 참여한 박헌영(朴憲永)·임원근(林元根)·김태연(金泰淵)·조동호(趙東祜) 등도 유력한 멤버들이었다.

화요회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조선기자대회(朝鮮記者大會)를 이용했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를 계획했다. 서울청년회와 반목 관계에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북풍회(北風會)와 같은 처지였다. 신사상연구회가 결성될 당시부터 조선공산당을 창립할 시기까지 화요회는 대체로 북풍회와 보조를 같이했다.

그러나 화요회는 이후 북풍회와도 반목 관계를 보였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주도권을 거의 독점한 데 대한 북풍회의 반발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북풍회는 1925년 3월 25일 임시총회에서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했다.

두 단체는 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와 더불어 4단체 합동위원회를 공동운영했다. 이어 1926년 4월 14일에 이르러서는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 해체를 보았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2(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現代史資料』29(姜德相編 , みすず書房, 1972)
『朝鮮獨立運動』5(金正明 編, 原書房, 1967)
『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坪江汕二, 日刊勞動通信社,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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