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국내 전 사회단체를 거의 망라한 협의체로서 1927년까지 민족주의 진영뿐만 아니라 화요회(火曜會) 등 사회주의 진영 사회단체까지 수렴한 거대한 협의체 조직이었다.
사회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고 각 부문 간 연계를 위해 설립되었다.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이하, 협의회)는 사상·청년·노동·농민·여성·형평 등 사회운동 전체에 관한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고, 사회운동 각 부문 간의 상호 연계 및 조직을 확충할 목적으로 1926년 2월 17일 조직되었다.
일제 치안당국은 이러한 발의를 1926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에 조직적 우위를 꾀하기 위한 시도로 파악하였다.
한편, 1926년 들어 서울청년회가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을 대비하여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무산계급정당의 준비기관으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의 조직을 발의한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협의회창립준비위원회는 1926년 4월 22일 강령과 조직, 창립 규정·창립준비위원을 발표했는데, 창립준비위원은 한해(韓海)·신철호(辛哲鎬)·임봉순(任鳳淳)·장채극(張彩極)·이상학(李相學)·김경식(金瓊植)·조기승(趙紀勝)·김병일(金炳一)·박형병(朴衡秉)·차재정(車載貞)·김재규(金在奎)·이영(李英)·한신교(韓愼敎)·김병욱(金炳旭)·배용렬(裴龍烈)·김태영(金台榮)·권중협(權重協)·안준(安浚)·주남재(朱南宰)·진평헌(陳平軒)·최창섭(崔昌燮)·김종건(金鍾健)·장적우(張赤宇)·고덕환(高德煥)·허일(許一)·허홍제(許弘濟)·박철(朴哲)·남윤구(南潤九)·맹두은(孟斗恩)·신준희(申畯熙)·김은환(金殷煥)·기노춘(奇老春)·김용환(金容煥)·이항발(李恒發)·서광원(徐光圓)·박달현(朴達鉉)·정선식(鄭宣植)·차주상(車周相)·이용기(李龍基)·이봉길(李奉吉)·임혁근(林赫根)·이동화(李東和)·배기영(裵基英)·임윤재(任允宰)·김석현(金碩鉉)·장애(張埃)·이춘균(李春均)·김대욱(金大郁)·박태선(朴泰善)·김창렬(金昌洌)·강제모(姜齊模)·이인수(李仁秀)·정운영(鄭雲永)·최석환(崔錫煥)·임종만(林鍾萬) 등 55명이었다.
1927년 5월 16일 협의회 창립대회가 출석 단체 272개, 대표자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열렸다. 회의 중 재일본무산청년동맹(在日本無産靑年同盟)의 최익한(崔益翰)이, 현단계는 민족적 단일 정당이 필요한 시기로 굳이 협의회를 두어 민족 단일당의 매개 형태로 성립한 신간회와 ‘두 개의 정당’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으므로 협의회를 비상설화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협의회 준비위원측에서는 이항발·한신교·박원희(朴元熙)가 등단하여 상설론을 폈는데, 그들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것이 이른바 ‘양당론’이었다. 결국 표대결로 들어가 제1일 회의는 비상설론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곧 지하의 제3차 조선공산당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협의회 제1일 회의는 새로운 의안을 작성할 위원으로 이우적(李友狄)·최익한·이평권(李平權)·이병의(李丙儀)·박치호(朴致浩)·김영식(金泳植) 등 7명의 위원을 선출하고 밤 1시경 폐회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조선공산당계의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작성한 의안은 경찰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5월 17일 제2일 회의가 18일 오전으로 연기되었다가 끝내 경찰의 집회 금지령으로 무산되었다. 새로 작성된 토의안이 본 회합을 통해 전민족적 단일당의 결성을 성취, 민족 해방의 목적 달성을 꾀하려고 했다는 게 금지 이유였다.
그 뒤에도 『조선일보』와 『조선지광(朝鮮之光)』 등을 통해 이른바 양당론 혹은 협의회의 상설·비상설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서울청년회측은, 협의회가 부르주아지나 프롤레타리아의 분리를 예비한 무산계급정당의 준비 기관으로 존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협의회는 지하의 당이 맡을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적 이익과 각 단체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이다. 협의회는 민족협동전선당(신간회를 지칭)과 협동과 대립을 병행해야 하는데, 반제투쟁에서는 협동전선을 펴야 하지만, 무산 계급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조선공산당계의 협의회 비상설론은 단순한 면이 없지 않았다. 민족협동전선당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 세계적인 조류이기 때문에 이에 역행하는 단체는 필요 없다는 것으로서, 그러한 주장의 배후에는 일면 이미 결성되어 있는 지하 조선공산당과 신간회에 대립할 수 있는 단체를 와해시키려는 전략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계는 민족협동전선당의 완성을 추구할 경우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독자성과 주도권 문제는 어떤 형태로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하등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는 이후에도 신간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논쟁의 주요 문제점으로 남았다.
1926년 6월까지 협의회창립준비위원회에 가입원서를 제출한 단체는 300개에 달했는데, 이 중 제1차 자격심사 결과 132단체, 총회원수는 약 2만 명에 달하였다. 그 뒤 1927년 5월에 이르기까지 제4회 자격심사가 행해져 가입단체는 874개, 회원수는 32만여 명이었다. 당시 사회운동 단체의 대부분을 망라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서울청년회와 대립하는 조선공산당의 이면 단체인 화요회계(火曜會系)의 단체들까지도 가입하였다. 조선공산당은 협의회를 조선공산당 및 신간회(新幹會)에 대한 조직적 대립으로 단정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1926년 5월 그 산하 단체들을 협의회에 가입시키기로 결정한다. 협의회를 비상설화시켜 실제적으로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
1926∼1927년 국내의 전 사회단체를 거의 망라한 거대 협의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