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회는 1925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운동단체이다. 북성회의 회원 약 20명이 동경에서 레닌 사망 1주년을 기념해 북성회를 해산하고 조직하였다. 동경시외에 사무소를 두고 편집부·서무부를 두어 『사상운동』과 『대중신문』 등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재일동경무산청년동맹·삼월회·재일조선유학생학우회 등의 조직을 원조하였다. 국내운동의 파쟁을 지양하여 운동노선의 통일과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1926년 노선이 동일한 정우회선에 따라 민족협동전선의 결성과 대중의 정치적 운동의 적극적 추진이라는 명분 아래 해체되었다.
북성회의 일월회로의 발전적 해체는 운동의 이론적 구명, 대중과의 결합 강화, 파벌 청산의 요청 등에 부응한 것이었다. 한 관헌자료는 안광천을 비롯한 재일북성회원들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김약수(金若水) 일파의 파벌적 행위를 혐오하여 일월회를 조직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안광천 등은 김약수 등 북풍회 간부들과 사전에 이 일을 상의하였다.
일월회가 결성 직후 내세운 강령은 세 가지이다. ① 대중본위 신사회의 실현을 도(圖)한다. ② 계급적 · 성적(性的) · 민족적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압박과 착취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투쟁한다. ③ 엄정한 이론을 천명하여 민중운동에 제공한다는 등이다.
강령을 실현하기 위한 방침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 내 사회운동의 파쟁에 대하여 절대 중립을 지키며, 그러한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전선(戰線)의 통일을 촉진한다. ②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 및 청년운동을 지도, 원조한다. ③ 국제운동으로서 동양 무산계급의 단결을 도모한다. ④ 무산자교육을 위하여 지방유세, 조합순회강연, 기관지를 발행한다는 등이다.
이 중 운동전선의 통일을 제창한 것은 일월회 운동노선의 가장 큰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무소는 동경시외에 두고 회 내에 편집부 · 서무부를 두어 기관지 『사상운동』(그 해 3월 창간)과 『 대중신문』(그 해 6월 창간)을 발간하였다.
각 부서와 그 담당자는 ① 편집부 : 안광천 · 김영식(金泳植) · 송언필(宋彦弼) · 온낙중(溫樂中) · 손종진(孫宗珍) · 박낙종 · 이여성, ② 서무부 : 하필원 · 방치규(方致規) · 김탁(金鐸) · 김삼봉(金三峰) · 김귀섭(金貴燮) · 유영준(劉榮俊) · 백무(白武) · 김광수(金光洙) · 하용식(河鎔植) · 김정규(金正奎) · 이상호(李相昊) · 김세연(金世淵), ③ 집행위원 : 안광천 · 이여성 · 하필원 · 김광수 · 김탁 · 송언필 · 김정규 · 박낙종 · 한림(韓林) · 신재용(辛載鎔) · 권대형(權大衡) · 노병춘(魯炳春) · 김상각(金相珏) · 신태악(辛泰嶽) · 박천(朴泉), ④ 상임위원 : 안광천 · 이여성 · 하필원 · 김광수 등이다.
또한, 박낙종 · 김세연의 노력으로 기관지를 비롯해 마르크스주의의 연구와 계몽선전을 위한 각종 출판물의 인쇄소를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부근에다 설치하였다. 안광천 · 정희영(鄭禧泳) · 이우적(李友狄) · 신태악 · 박천 등은 김천해(金天海) · 서진문(徐鎭文) 등의 노동운동가들과 결합해 재일조선노동총동맹을 조직하였다.
그 밖에도 일월회는 재일동경무산청년동맹 · 삼월회 · 재일조선유학생학우회 등의 조직을 지도, 원조하였다. 일월회의 자매 여성단체로 삼월회가 1925년 3월 이현경, 황산덕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무산계급과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① 대중본위의 신 사회건설을 도모한다. ② 무산계급 및 여성의 억압과 착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쟁을 도모한다. ③ 목표와 방책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과학적 이론의 보유를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월례연구회를 열어 이론을 학습하였다. 다카쓰(高津正道) 등 일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사회과학 강습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일본 중국 국민당동경지부원들과 결합해 극동무산계급 해방을 위한 기초로서 극동문제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5년 7∼8월 우리나라에 대수해가 일어나자, 조선노동총동맹 및 일본의 노동단체와 공동으로 조선수해이재자구제위원회(일월회 · 재일조선노동총동맹 · 정치연구회 · 관동노동조합 산하 각 조합 · 일본농민조합관동동맹)를 결성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모인 구제금 1,450여 엔을 전달하기 위해 1926년 2월 안광천 · 김세연 · 다카쓰 · 구로다(黑田壽男) · 스지이(汁井民之助) 등이 서울에 파견되었다.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서울청년회와 화요회(火曜會)를 비롯한 각종 단체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일월회원들은 파쟁을 지양하여 운동노선의 통일을 기할 것을 강조하였다.
『대중신문』과 『사상운동』을 통해 활동 방향을 보면 1925년 6월 5일 창간한 『대중신문』에서는 2대 운동을 목표로 내걸었다. ① 무산계급과 준무산계급의 구체적 대중운동의 전개, ② 무산계급의 민족주의적 투쟁요소와의 공동전선의 신설, 특히 『대중신문』 3호의 사설은 단일 합법적 전위당의 결성을 강조했다.
1925년 10월 25일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조직 개편이 있었다. 그 부서와 담당자는 ① 서무부 : 이여성 · 김탁 · 김광수, ② 선전부 : 하필원 · 송언필 · 김정규 · 박천, ③ 조사부 : 안광천 · 이상호, ④ 편집부 : 박낙종 · 한림 · 변희용(卞熙鎔) · 신태악 · 하용식(河鎔植) · 방치규 등이다.
이 총회에서의 결의에 따라 그 해 11월 17일부로 재일조선노동총동맹 ·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 · 삼월회와 함께 4단체 연명으로 국내운동의 파벌 지양과 대동단결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내의 파벌싸움에 대한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일월회는 북풍회와 차차 대립적 관계에 놓였던 듯하다. 북풍회는 1925년 10월 일월회 회원인 김삼봉으로 하여금 무산계급해방운동전선의 전위로서 동경에 신성회(新星會)를 조직하게 하여 일월회에 대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월회의 설득공작에 의해 신성회는 1926년 1월 스스로 해체하였다. 1926년 1월 일월회는 창립 1주년을 맞아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주요 내용 역시 단일운동전선을 편성하자는 것이었다.
1926년 8월 여름방학을 맞아 안광천 · 하필원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파벌 청산을 표방하고, 조선공산당이 주도하는 표면운동단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였다. 그들은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정우회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정우회를 장악하였다.
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와해된 당을 재건하던 김철수(金綴洙)는 안광천을 끌여들여 1926년 9월 20일 조선공산당에 입당시켰다. 1926년 11월 15일 조선공산당이 신간회에 참여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정우회선언’이 발표되었는데, 그것은 안광천이 작성한 것이었다.
1926년 8월 이후의 일월회 노선은 그대로 지하 조선공산당과 정우회의 노선과 동일하였다. 정우회선언에 따라 일월회는 민족협동전선의 결성과 대중의 정치적 운동의 적극적 추진이라는 명분 아래 사상단체로서의 소임은 끝났다고 하여 1926년 11월 28일의 총회에서 해체를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