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천은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일월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정우회선언'을 기초하여 방향전환론과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다.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으로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하였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레닌주의』를 발행하였다.
안광천(安光泉)은 1897년 경상남도 진영(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안효구(安孝駒)이고, 이명은 안호우(安乎于) · 노정환(盧正煥) · 사공표(史空杓)이다. 대한제국 시의(侍醫)를 지낸 안왕거(安往居)의 아들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자혜병원의 의사로 근무하였다.
1923년 1월 김해청년회를 조직하였고, 8월에는 북성회(北星會) 순회강연을 계기로 사회주의사상 연구를 위해 제사회(第四會)를 조직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북성회에 가입하였고, 1925년 1월 하필원(河弼源), 박낙종(朴洛鍾) 등과 함께 북성회를 해체한 뒤 일월회를 조직하였다. 일월회의 상무집행위원으로 강령을 기초하였고, 기관지 『사상운동』에 각종 논설을 기고하였다. 1925년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였고, 11월에는 재일본 각 부문 운동의 통일을 위한 관동조선무산계급단체협의회의 조직을 주도하였다.
1926년 1월 파쟁 청산을 위해 북풍파의 사상운동 단체인 신성회(新星會)를 해체하게 하였다. 그해 2월 조선기근구제회에 수재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도쿄에서 귀국하였을 때 화요파와 서울파의 통합을 권유하였다. 3월에 다시 도쿄로 가서 내지운동연구회의 명의로 ‘분립으로부터 통일에’라는 리플릿을 발행하여 사회주의운동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이 시기 박낙종, 하필원 등과 함께 허장환(許璋煥)을 책임자로 하는 혁명사(革命社) 도쿄지부를 조직하였다. 허장환이 귀국한 후 책임자가 되었다. 그해 3월에는 『통속사회주의경제학』을 일월회의 권독사(勸讀司) 팸플릿으로 발행하였다.
1926년 여름 하필원과 함께 귀국하여 9월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였고, 상무집행위원과 서무부 책임자가 되었다. 경제 투쟁에서 정치 투쟁으로의 방향 전환과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촉구하는 ‘정우회선언’을 기초하여 11월 15일 발표하였다. 12월 6일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후 정우회 해체와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조선공산당 내의 비(非) ML파의 비판과 함께 1927년 9월 영남친목회 사건으로 ML파 내부의 비판으로 책임비서직에서 물러나 선전부원으로 강등되었다. 그해 11월 『 조선지광』에 「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를 발표하여 헤게모니(Hegemonie) 전취론을 당면 과제로 제시하였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정치부장이 되었고,「민족해방운동에 관한 논강」을 작성하였다. 그해 5월 아내 이현경(李賢卿)을 불법으로 복당하게 한 문제로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당규 문란을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9년 베이징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레닌주의』를 발행하는 한편,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레닌주의정치학교에서 양성한 20여 명을 당 재건운동을 위해 국내에 파견하였다.
저서로 『통속사회주의경제학』이 있다. 주요 논설로는 「분립으로부터 통일에」(1926. 3.), 「정우회선언」(1926. 11,), 「신간회와 그에 대한 임무」(1927. 11), 「민족해방운동논강」(1928. 2.), 「조선(朝鮮)의 정세(情勢)」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