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송(文甲松)은 중국 펑취안〔奉天, 지금의 선양〕 출신으로,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부모와 함께 1916년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왕경(王耿) · 옥봉장(玉鳳章)이라고도 불렸다. 둥닝〔東寧, 동녕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1922년 8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24년 중동선(中東線) 구역 육참(六站)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그해 12월 블라디보스토크의 혁공(革工)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0년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그해 2월 만주성위원회 파견원 자격으로 옌볜〔鹽邊〕으로 갔다. 이후 조직을 확대하여 동만특별지부를 조직하고 서기가 되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로 박윤세(朴允世)와 함께 동만주로 파견되어 전동만폭동위원회 등을 조직하였다. 5월에는 중국공산당 연변특별지부를 조직하고, ‘간도 5 · 30봉기’를 지휘하였다. 8월에는 옌볜 제1차 당원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국공산당 연화중심현위원회(延和中心縣委員會)를 결성하고 서기가 되었다. 10월에는 연화중심현위원회가 발전하여 동만특별위원회가 결성되자 조직부장 겸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5월 중국공산당 요대현위원회(遼臺縣委員會)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일제의 봉천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7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소요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수감 기간 중 옥중 투쟁을 목적으로 결성된 옥내(獄內)공산주의자동맹에 참가하였다.
1945년 9월 재건파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조선공산당의 서기국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8월 3당 합당을 비판하는 ‘합당 문제에 대하여 당내 동지 제군에게 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로 인해 당 중앙의 노선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정권(停權)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에 참가하지 않았고, 사회노동당에 참여하여 임시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5월 근로인민당 결성대회에서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