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순(朴鎭淳)은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이명은 춘우(春宇, 春雨)이다. 부농인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운 후, 블라디미르-알렉산드로프스크 시에 있는 상급학교에 입학하였다. 1916년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한인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이후 혁명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해 11월 활동지를 하바롭스크로 옮겼다. 1918년 4월 28일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되었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서는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7월애는 코민테른에 파견할 한인사회당 대표 3인으로 선임되어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기관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에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운동」, 「혁명적 동방과 코민테른의 다음 과제」 등을 기고하였다.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민족 · 식민지분과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한인사회당 제3차 대회를 개최하고, 그 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조하였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 겸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레닌과 회견하였다. 1922년 4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한부 당무 정지 처분을 받았다.
1922년에서 1925년 모스크바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공부하였다. 1927년에서 1928년에 모스크바의 고등교육기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강의하였다. 모스크바의 외국인노동자출판부에서 조선분과 검열 담당 편집인으로 근무하던 중 테러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1937년 12월 15일 체포되었다. 1938년 3월 19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로부터 총살형을 선고받은 당일에 형이 집행되었다.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의 판결로 복권되었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