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했다. 호는 동광(東光)이다. 일본 동경(東京)에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동양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하고,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하였다.
동경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고 간부가 되었다. 1926년 8월 무렵 귀국하여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였다.
12월에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 경기도 대표로 참가하여 조직부장으로 선출되었고, 조선공산당 제2회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선전부 부원이 되었으며, 1927년 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8월에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조선지광 朝鮮之光≫의 기자가 되었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사임하였다.
1928년 2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으며, 1930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35년 5월 조선공산당재건 경남그룹에 관계했다는 혐의로 검거되었으나 면소 처분을 받았다.
1945년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의 좌익계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수립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 겸 중앙인민위원회 경제부장, 헌법기초위원 등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8일 조공재건준비위원회(재건파)와 조선공산당(장안파) 간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계동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여 ‘재건파’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946년 2월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위원 겸 경제대책연구위원회 책임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 간담회’에 서울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였다.
대구에서 ‘10월 사건’이 발생하자, 각 정당이 연합하여 남한 소요지역에 대해 합동조사를 벌일 때 조선공산당 대표로서 경부선 방면 조사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1월경 조선공산당·인민당·신민당 등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사회노동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47년 1월 사회노동당을 해체하고 남조선노동당에 참가하자는 탈당 성명을 발표하고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다.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