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김헌식(金憲植), 김려수(金麗水), 음달. 전남 광주 출신이다.
1923년 10월 서울에서 북성회(北星會)계 사상단체 건설사(建設社) 창립에 참여했다. 1924년 7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에 참여하고 7인의 경영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전남 지역 영업 책임을 맡았다.
1925년 5월 광주청년회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9월 창립 5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현실과 청년’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10월 나주군 궁삼면 토지회수운동동맹 결성식에 광주청년회 파견원으로 참석했다.
1926년 1월경 강석봉(姜錫奉) 등 50여 명과 함께 화요회계의 광주노동공제회 외 6개 사회운동단체를 습격한 일로 인해 3월 벌금형에 처해졌다. 2월에 열린 전남해방운동자동맹 제2년 제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서울계의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을 지냈다.
7월 고려공산청년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통합해 고려공산청년회를 건립할 것을 결의했고, 8월 통합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광주 지역 사회운동의 통합을 목표한 ‘광주협회’ 결성을 지원했다. 그 시기 사상단체 신우회(新友會) 총간사회에서 재광주사회단체대표자간친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강석봉, 유혁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전라남도위원회라는 조공 전남 도기관을 결성하고 선전부 업무를 담당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 전남 도기관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즈음 지룡수(地龍洙)·강해석(姜海錫)·소진호(蘇鎭浩) 등에게 고려공청 가입을 권유해 광주내 유학관(幽學館)에 근거를 둔 고려공청 광주야체이까를 설치하고 그 책임을 맡았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광주를 대표하는 사회운동가로 부각되었다.
이후 4월에 전남청년연맹 제3회 정기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8월에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11월에 광주청년연맹을 해체하고 광주청년동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에 참여했으며, 12월 대표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회 대회에 전남 대표로 출석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3월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가 되었다. 7월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되었으나 다음 해 12월 폐결핵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서울의 불교자혜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930년 1월 12일 사망했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