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일제의 강제적 한국 병합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러시아의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만세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만세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파급되었다. 3월 8일과 3월 10일에 대구의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대구 만세 시위운동은 경상북도 도내로 파급되었다.
1919년 3월 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沙月里) 교회 목사 김기원(金基源)은 대구의 만세 시위운동을 전해 듣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경주군 경주면 도동리(道東里) 교회의 목사 박내영(朴來英)과 교회의 영수 윤기효(尹琪涍), 박문홍(朴文泓) 등을 만나 대구 만세 시위운동을 전해 주고 만세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1919년 3월 11일과 12일 밤에 도동리 교회에서 박내영 목사 등이 교회 신도 5, 6명과 만나 3월 13일 경주 큰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경주경찰서는 시위를 열기로 한 3월 13일 새벽 박내영 목사의 집과 교회 관계자의 집을 수색하여 태극기를 발견하고, 박내영 목사와 박문홍 등 15명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주동자들의 검거로 3월 13일 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경주읍의 작은 장날인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애국청년 박봉록(朴鳳祿), 서봉룡(徐鳳龍), 박무훈(朴茂勳), 최성렬(崔聖烈) 등이 주동이 되어 12일 밤 박문홍 집에서 만든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꾼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경찰들이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경주 도동리교회의 만세 시위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3월 15일 재점화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내영 목사와 시위 주동자였던 박영조(朴永照), 박문홍, 김학봉(金學鳳) 등에게는 징역 10월, 최창수(崔昌壽)에게는 징역 8월, 손석봉(孫石鳳), 최성렬(崔聖烈)에게는 징역 6월, 김성길(金成吉), 박봉록에게는 징역 5월, 김성필(金晟弼), 김철(金喆)에게는 징역 4월이 각각 선고되었다.
경주의 만세운동은 3월 8일과 10일의 대구 만세 시위운동으로부터 촉발되었으며, 이를 전한 것이 경산 고산면의 교회 목사였다는 점에서 기독 교회 간의 폭넓은 네트워크 및 삼일운동에서 교회의 역할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