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성진 출신. 서울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시대일보』 성진지국 기자로 언론에 종사했다. 1924년 12월 성진의 사상단체 신인회의 창립을 발기했고, 그 회가 운영하는 노동야학 교사가 되었다. 1925년 8월 성진에서 반종교운동의 일환으로 열린 보천교성토 강연회에 연사로 강연했다.
1925년 11월 신인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1926년 2월 명칭을 변경해 과학사상연구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나 역시 일제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다. 1926년 11월 단천·길주 지역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보급하기 위해 사상단체 태양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2월 성진청년연맹을 대표해 학중면에서 일어난 토지 부당매각 사건을 조사했다.
1927년 2월 함북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신간회 성진지회와 재만동포옹호동맹의 상무위원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12월 성진청년연맹을 해체하고 성진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각 세포단체에 파견된 3인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고, 성진청년동맹 창립대회에서 서기로 활약했다.
같은 해 말과 1928년 초 사이 조선공산당 성진야체이카 결성에 참여했다. 1928년 1월 성진청년동맹 집행위원회에서 동맹을 대표해 백광흠(白光欽)과 박원희(朴元熙)를 추도했고, 3월 하부조직 설치를 촉성하기 위한 지방순회위원으로 선정되어 성진면을 담당했다.
4월 함북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수리조합 등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을 비판하고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1928년 성진청년동맹이 주최한 메이데이 기념강연회에서 「메이데이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이즈음 열린 성진청년동맹 각 지부 설치대회에 참석해 청년운동의 조직 방침과 투쟁 방침에 대해 설명했다.
7월 ‘함북청년연맹 사건’으로 검거되었으나 1931년 1월 경성(京城)복심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3월 해소를 결의하기 위해 열린 신간회 성진지회 대표자대회에서 서기를 맡았고, 집행위원 겸 본부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1931년 5월 신간회 본부 전체대회에 참석해 해소론을 주장했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기존의 북성농민조합을 확대 개편한 성진농민조합을 창립하고 중앙조직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4년 10월 청진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