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개성 출신. 호는 하연(何然).
1894년 농민전쟁이 발생했을 때 가족과 함께 경북 풍기면 금계리(金鷄里)로 이주했다.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19세 때에 모친상을 당했다. 1911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 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귀국 후 박시묵(朴時默)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 13도 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이 되었다. 영주의 김교림(金敎林), 이풍환(李豊煥) 등에게 독립운동자금 출연을 권유하는 문서를 발송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제령(制令)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2년 5월 건강이 악화되어 가출옥하였다.
1923년 1월 김동필(金東弼) 등과 함께 풍기소작조합을 설립했으며, 실형 강응진(姜膺鎭)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월 고려공산동맹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또 청년운동가를 통괄하는 동시에 당원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는 데도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동아일보)를 발표하고 약 9,000여 평의 토지를 풍기소작조합에 기부했다.
그 직후 가족을 데리고 상경해 사회 활동에 매진하였으며,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1923년 9월 1일 서울계에서 주도한 조선노농대회준비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면서 지방 단체를 대상으로 준비회 가입을 권유하기 위한 경상도 파견 위원이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4월 82개의 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조선노농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후 조선노동연맹회측과 연합해 결성된 전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4년 5월 서울파를 대표해 통일 조선공산당 결성을 협의하기 위해 소집된 각파 공산주의자그룹의 대표자 회합인 13인회의에 참석했다.
12월 ‘농민단체와 노동단체를 결합하고 단체 위력에 의한 지주 및 자본가에 대항해 노동자계급 사회를 실현한다’는 강령아래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경북 상주에서 개최된 사회운동자간친회를 통해 서울계의 경북지도기관으로서 경북사회운동자동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준비위원이 되었다. 이 때문에 허일(許一), 윤우열(尹又烈)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6월에 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2월에 출옥한 후 서울계가 ‘조선 무산계급 사상운동단체의 통일적 발달을 기한다’는 강령으로 결성한 조선사상동맹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7월풍기로 돌아와 요양했으나 10월 24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풍기에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뤄졌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