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섭은 일제강점기 평양지방법원 판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간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77년(고종 14)에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평양지방법원의 판사와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을 역임하였다. 1922년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였고, 의용단을 결성하고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1924년 결성한 한족노동당을 재편하여 경상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재만농민동맹을 결성하였다.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동북인민혁명군의 기반이 되었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 삼원보(柳河縣 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1922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북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북 출신의 김시현 ·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했다. 6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했다.
1924년 12월 길림성 반석현(吉林省 盤石縣)에서 경북의 김원식(金元植) · 김상덕(金尙德) 등과 함께 ‘자유 평등의 정신과 공존공영의 대의로써 노력대중을 단결하고 신생활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한족노동당은 당원이 한 때 1,300명에 달했고, 기관지로 「노동보」를 발행하였다. 그리고 네르흐네우진스크 치타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한족노동당을 대표해 참가하였다. 이 때 일제 정보당국이 “김응섭은 만주일대에 할거하는 조선인비적단 정의부의 심판원장으로 취임했을 뿐 아니라, 상해임정 국무령 이상룡의 막하로 입각한다.”고 파악하였다.
1926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7년 4월 15일 길림현 신안둔(吉林縣 新安屯)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을 위한 제1차 각단체대표회의에 정의부 김동삼, 남만청총 박병희, 안창호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대표해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가 각 단체 대표자회의일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최동욱(崔東郁) · 박병희(朴秉熙) 등과 함께 시사연구회(時事硏究會)를 결성하고 위원이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북 출신의 김동삼 · 김원식 · 이영형 · 김상덕 · 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