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고종 31)의 갑오경장 당시 관제개편의 결과 종래의 형조가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바뀌고 의금부가 의금사(義禁司)로 개칭되면서 법무아문의 소속이 되었다. 이 의금사의 책임자로 판사를 두고 법무아문의 대신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법무아문이 법부로 개칭되면서 의금사도 다시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로 개칭되었다. 각 재판소의 판결에 불복해 상소(上訴)하는 자에 대해 합의재판(合議裁判)을 맡았다.
책임자로 법부대신(法部大臣)이나 협판(協辦)이 겸임하는 재판장 1인과 법부의 칙임관(勅任官)이나 주임관(奏任官)이 겸하는 판사, 검사(檢事) 각 2인, 판임관(判任官)의 서기(書記) 3인, 정리(廷吏) 약간 명을 두고 그밖에 법부의 칙임관, 주임관이 겸임하는 예비판사(豫備判事) 2인, 판사시보(判事試補)·검사시보 등을 소속시켰다.
같은 해 신설된 법부 소속의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각 지방재판소에도 판사를 두었다. 각 지방재판소의 경우 각도, 각 항구의 개시장(開市場) 재판소의 판사는 그 지방관찰사나 감리(監理)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또, 1897년의 관제개정에서 한성재판소에는 수반판사(首班判事)·부판사(副判事) 등을 두었다.
그 뒤 1889년에는 고등재판소를 개칭해 평리원(平理院)이라 하고 칙임관의 재판장 1인, 칙임관 또는 주임관의 판사 4인, 검사 3인 등으로 관원의 수를 바꾸었다. 이 해 한성재판소도 한성부재판소로 개칭되면서 수반판사가 폐지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한성재판소로 바뀌고 수반판사의 제도도 부활되었다.
1901년에는 종전의 한성부재판소로 명칭이 부활되면서 수반판사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겸했고, 판사 3인 중 1인은 소윤(小尹)이 겸임하였다. 1904년에는 재차 한성재판소로 개칭되고 칙임관의 수반판사를 두었다.
그리고 황족 중 범죄자가 있을 때 열리는 특별법원에서는 초기에 법부대신, 후기에 평리원재판장이 겸하는 재판장 1인과 판사 4인이 사건을 심리하였다. 이 때의 판사 구성은 우선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중에서 1인을 뽑고 나머지 3인은 평리원과 한성부재판소의 판사, 검사나 법부의 칙임관·주임관 중에서 선임하였다.
또한, 평리원에서는 매년 3월에서 9월 간에 각 지방에 순회재판관(巡廻裁判官)을 보내 그 지방의 민사·형사 사건의 불복자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도 판사·검사 각 1인과 기타 서기나 정리 등이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