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화(九和), 호는 하구(何求)·학우(鶴右).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길림으로 망명하여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2년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과 같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혁명단체대표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의 파괴, 일제요인의 암살 등을 계획하고 경기도 경찰부의 황옥(黃鈺)과 제휴하여 거사하려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1929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에서 독립동맹을 조직, 활동하였다. 1931년 북경에서 활동하던 중 잡혀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5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또 다시 북경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42년북경의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잡혀 투옥되었다.
1945년에는 일본헌병대에 잡혀 수감되었다가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고려동지회 회장, 전보통신사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민주국민당에 입당하여 고문으로 있다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석방되었고, 같은 해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가 5·16군사정변 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