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운동이 본격화 되자,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중 가장 유력했던 정의부(正義府)는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정의부의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이광민(李光民)·김원식(金元植)·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현정경(玄正卿) 외 11명과 정의부 군대측의 이웅(李雄) 외 11명,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의 박병희(朴秉熙) 외 10여 명,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의 김응섭(金應燮)과 그밖에 안창호(安昌浩)·이일세(李一世) 등 52명이 참석하였다.
그런데 김응섭 등이 회의 첫날부터 완전한 각 단체 대표자회의가 아니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넷째날에는 퇴석자(退席者)가 속출하는 바람에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일부 대표들이 모여 지속적으로 논의한 끝에 시사연구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시사연구회는 이탁(李沰)·최동욱(崔東郁)·이일세·김응섭 등을 위원으로 선임해 민족유일당 조직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은 근본적으로 단체본위의 조직론, 단체중심의 조직론, 개인본위의 조직론으로 나누어진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1927년 8월 정의부는 제4회 중앙총회에서 민족유일당촉성회의를 속히 진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시사연구회를 개최한 뒤, 그 해 12월 반석(磐石)에서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南滿革命同志聯席會議)를 열고 재만 32개 독립운동단체에 1928년 3월 1일을 기하여 유일당조직촉성회의를 열기 위한 대표를 파견하도록 통지문을 보냈다.
그 뒤 1928년 1월 정의부의 오동진, 신민부의 김혁(金赫)·유정근(兪政根) 등이 일본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제휴·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참의부가 참석하지 못한 채, 시사연구회 등의 주도로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길림성 화전(樺甸)과 반석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망라한 18개 단체대표 39명과 방청자 30명이 모인 가운데 세 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그런데 각 단체들의 주장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집행위원 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까지 겹치면서, 결국 기성단체를 부정하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와 기성단체 본위를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로 분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