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파 ()

근대사
단체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창조를 주장한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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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창조를 주장한 집단.
설립목적

박용만·신숙·윤해 등을 중심으로 한 미주의 박용만계, 북경의 천도교계, 대한국민의회계의 인물 집단이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비판·부인하고, 새롭게 국민위원을 선출하여 헌법을 제정한 후 위원제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21년 북경에서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여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비판하고 군사투쟁을 주장하였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변혁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를 촉구하였고,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의 창조를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자, 독자적으로 국호를 한(韓), 연호를 단군기원으로 하였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하여 헌법을 마련하고, 국무위원회에 입각한 신정부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1924년 초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국민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창조하려다가 소비에트 러시아정부의 배신으로 연해주에서 쫓겨나 북경에 돌아왔다.

1924년 북경에서 신숙, 원세훈 등은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조직한 후 민족유일당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1926년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를 조직하고 이후 중국 관내의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초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정책을 비판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민족 대단합에 의한 임시정부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창조의 고집으로 민족운동세력의 분열을 초래한 점이 없지 않다.

참고문헌

「국민대표회(1921~23) 연구」(조철행, 『사총』 44,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1995)
「국민대표회의」(김성민,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3)
「1920년대 중반 재북경 창조파의 민족유일당운동」(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3)
집필자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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