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해주 출신.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중학강습과를 마친 뒤 니혼대학[日本大學] 문과,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과를 다니다가 1923년경 귀국하였다.
1924년 2월 해주노농회 임시총회에서 임시의장이 되고, 6월 해주청년회 간부가 되었다. 1925년 1월 동경(東京)에서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 편집부 위원이 되어 기관지 『사상운동(思想運動)』 발행에 참여했으며, 「소부르주아사상과 무산계급사상」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였다.
1926년 9월 해주청년회 주최 국제청년데이 기념강연회 연사로 선정되었다. 1926년 11월 해주청년회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2월 ML그룹에 의해 장악된 ‘제3차 조선공산당’에 참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조선청년총동맹이 민족적 청년단체 모두를 망라하여 청년운동을 새롭게 전개하고자 했을 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공개적인 활동의 이면에서는 1927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노동 제2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무렵 동경에서 발행되던 당 기관지 『현계단(現階段)』의 책임편집위원으로 선정되어 일본으로 갔다가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1931년 1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9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5월 정판사(精版社)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다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위해 일으킨 ‘정판사위조지폐사건’으로 검거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