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적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일본부와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대중신문』과 『이론투쟁』의 기자이자, 『대중신문』과 『현계단』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장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선전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우적(李友狄)은 경상남도 사천 출생으로, 본명은 이응규(李應奎)이다. 1924년 3월 진주의 사립양정학원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1925년 4월 켄슈학관〔硏修學館〕 초등영어과에 입학하고, 1926년 3월 졸업하였다. 그해 4월 켄슈학관 고등과에 입학하였으나, 1927년 3월 퇴학당하였다.
1925년 1월 일월회에 가입하였고, 1926년 1월 동경조선무산청년동맹회에 참가하여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6월부터 『 대중신문(大衆新聞)』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7년 『이론투쟁(理論鬪爭)』이 창간되자 기자 및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선전부 책임자이자 도쿄 북부 야체이카(세포조직)에 배속되었다. 그해 11월에는 조선공산당 일본부 선전부장이 되었고, 제3구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이 시기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입하였고, 당 프랙션에 배속되었다. 12월에는 신간회 도쿄지회 출판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1928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기관지인 『대중신문』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의 기관지 『현계단(現階段)』의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그해 8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주도의 국치일 기념투쟁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대한 검거가 진행되자 1929년 7월 귀국하였다.
1930년 6월 김상혁(金相赫) · 이종림(李宗林)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선전책임을 맡았다. 1931년 7월 대구에서 개최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12월 전라남도 지역의 ML파 사회주의자들을 모아 열성자대회를 개최하였다. 혁명적 농민조합과 혁명적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지도하기 위해 17개의 사회운동 단체를 규합하여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반제부와 교육부의 책임자를 맡았는데, 1932년 3월 검거되어 이듬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35년경 경기도 양주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일환으로 이재유(李載裕) · 인정식(印貞植) · 이관술(李觀述)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 서울준비그룹의 재편을 모색하다가 검거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최익한(崔益翰) · 하필원(河弼源)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서울시당부를 조직하고, 장안파 조선공산당에 합류하였다. 그해 9월 계동에서 열린 열성자대회에 참석하였고, 같은 달 통일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 간담회에 서울 대표로 참석하여 13인 당원 연명으로 '조선공산당대회 소집준비위원회 구성 건의서'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하며 박헌영(朴憲永) 중앙을 비판하였다. 같은 해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에 참가하지 않고 사회노동당에 참여하여 선전부장과 임시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1월 사회노동당을 해체할 것과 남조선노동당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탈당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서울 진공 당시 사망하였다.
주요 논설로는 「사고의 선행자로서의 실천, 반유물론자(反唯物論者) 김태수 씨에게 답함」(『조선지광』 73, 1927.11.), 「정치운동에 대한 사견, S 형의 서간에 답함」(『이론투쟁』 1, 1927. 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