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유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재유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이재유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김소성(金小成), 전소수(全素洙)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5년
사망 연도
1944년
출생지
함경남도 삼수
내용 요약

이재유는 일제강점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1905년에 태어나 1944년에 사망했다. 김소성(金小成)·전소수(全素洙)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1925년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할 때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인 노동단체와 사상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검거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대중적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수감되었다. 형기 만류 이후에도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아 끝내 옥사하였다.

키워드
정의
일제강점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 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이명은 김소성(金小成) · 전소수(全素洙). 함경남도 삼수 출신. 삼수군 별동면(別東面) 선소리(船所里)의 화전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삼수의 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니다가 1922년 서울에 와서 1924년 4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가 퇴학하였다. 이듬해 1925년 4월 개성의 사립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26년 11월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1926년 12월에 동경으로 건너가서 사립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학적을 두고 고학하다가 학비 때문에 곧 퇴학하였다. 그리고 노동하면서 1927년 봄부터 동경대 신인회 주최의 야학노동학교에서 배웠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흥미를 가지고 전국무산자평의회, 동경합동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동경조선노동조합, 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 신간회 동경지회 등의 위원으로 조선인 노동단체와 사상단체 등에서 일하였다. 이와 아울러 1927년 후반기 이후 비합법운동에 참여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요시찰인으로 편입되고 곧 이어 8월 제4차 조선공산당 관계자로 검거되어, 조선으로 호송되기까지 3년 동안의 동경 생활에서 경찰서에 검거된 횟수만도 무려 70여 차례에 이르렀다. 1930년 11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 6월을 선고받아 1933년 12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이현상(李鉉相) · 김삼룡(金三龍) · 변홍대(卞洪大) · 안병춘(安炳春) · 이종희(李鍾嬉) · 이순금(李順今) 등과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대중적 노동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같은 해 4월에 탈주해 경성제국대학의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대학관사에 은신하다가 이후 박진홍(朴鎭洪) · 이관술(李觀述) · 박영출(朴英出) 등과 함께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과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 5월에는 양주군 노해면(蘆海面) 공덕리(孔德里)에 정착해 이관술과 함께 『적기』를 발행하는 등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36년 12월에 체포되어 예심과 3차례의 공판을 거쳐 1938년 7월에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였다. 옥중에서도 이재유는 조선어사용금지반대, 수감자의 대우개선, 간수들에 대한 사상고취 등의 운동을 전개해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형기 만류 이후에도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았다. 1941년 예방구금제도의 적용을 받아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1944년 10월 26일 40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일제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노동운동에서 신화적 존재로 평가받았던 이재유의 운동은 크게 보아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1932년 12월 경성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 1934년 1월 일제 경찰에 검거되기까지의 1년 남짓한 시기(경성트로이카 시기), 제2기는 1934년 4월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해 1935년 1월에 걸쳐 대략 10개월 정도 지속된 시기(경성재건그룹 시기), 제3기는 1936년 12월에 검거되기까지 2년 정도의 시기(경성준비그룹 시기)가 그것이다.

각 시기를 통해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재유는 계급적 편향을 가지고 있었던 대다수의 노동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혁명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민족문제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조선의 독립과 ‘조선적’ 공산주의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이재유는 코민테른 등의 국제조직에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거나 교조적이고 경직된 이론을 고수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의 현실에 대한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운동방침을 수립해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이재유의 노동운동은 흔히 국내에 기반을 둔 국내파운동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당시의 사회주의운동이나 노동운동에서 대부분의 운동가들이 지식인과 전위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에 비해 이재유는 대중의 역할과 아래로부터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재유는 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중에 대한 지도라기보다는 대중운동에 대한 응원의 차원에 보다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운동자들과는 달리 이재유는 운동노선의 수립과 실천에 관련된 많은 저작들을 남겼다. 현재 전해 오는 것은 거의 없다 하더라도 「자기비판문」, 「일상생활의 주의」, 「군중접촉의 주의」, 「회합시의 주의」, 「공장내의 활동기준」, 「학교내의 활동기준」, 「세말캄파니아 투쟁방침서」, 「8 · 1캄파니아의 구체적 실행방법」, 그리고 1937년 감옥에서 자술서형식을 빌어 쓴 「조선에서 공산주의운동의 특수성과 그 발전의 능부(能否)」 등의 논문과 팜플렛 등이 그것이다.

이재유의 사상과 운동은 일제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민족해방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정수를 가장 잘 드러내면서 민족적이고 민중적, 혁명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유의 운동은 일제말기 박헌영, 이현상 등의 이른바 경성콤그룹과 해방 이후의 남조선노동당으로 계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주의운동의 주체적 전통이라는 점에서 박헌영의 사상이나 운동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이재유연구: 1930년대 서울의 혁명적 노동운동』(김경일, 창작과 비평사, 1993)
「1930년대 경성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연구」(변은진, 『일제말 조선사회와 민족해방운동』,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일송정, 1991)
「자주적 공산주의자 이재유의 혁명노선과 ‘좌익전선운동’」(안태정, 『역사비평』14, 1991년 가을호)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운동」(이애숙, 『일제하사회주의운동사』, 한국역사연구회, 1930년대 연구반, 한길사, 1991)
「조선민족해방 영웅적 투사 이재유 탈출기」(금강산인, 『신천지』1946년 4·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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