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 출생. 어려서 시골의 학당을 다녔을 뿐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관계하였다.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李載裕)를 중심으로 한, 이관술(李觀述)과 그의 누이동생인 이순금(李順今:김삼룡의 처), 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여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검거되자 고향인 충주에 은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 · 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초치하자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9년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의 지도로 경성전기 · 대창직물 · 경성방직 · 용산철도공작소 · 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보였으나,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잡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하여,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金炯善)과 함께 조직책임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 · 이강국(李康國)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 조선인민당 · 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조직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승엽(李承燁)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하다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제의한 조만식(曺晩植)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