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

목차
관련 정보
김삼룡
김삼룡
정치
인물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노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노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내용

충청북도 충주 출생. 어려서 시골의 학당을 다녔을 뿐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였고,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관계하였다.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李載裕)를 중심으로 한, 이관술(李觀述)과 그의 누이동생인 이순금(李順今:김삼룡의 처), 이현상(李鉉相)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여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검거되자 고향인 충주에 은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 · 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주1하자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9년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의 지도로 경성전기 · 대창직물 · 경성방직 · 용산철도공작소 · 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보였으나,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잡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하여,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金炯善)과 함께 조직책임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 · 이강국(李康國)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 조선인민당 · 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조직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이승엽(李承燁)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李舟河)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하다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제의한 조만식(曺晩植)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사형이 집행되었다.

참고문헌

『박헌영』(박갑동, 인간사, 1983)
『조선해방연보』(민주주의민족전선, 문우인서관, 1947)
주석
주1

불러서 안으로 들임.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남식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