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선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형선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형선 전후면
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 대리,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김원식(金元植), 최명환(崔命煥)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5월 7일
사망 연도
1950년
출생지
경상남도 마산
정의
해방 이후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 대리,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적은 경상남도 마산(馬山). 이명은 김원식(金元植), 최명환(崔命煥). 어머니가 민족 사상이 격렬해 자식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여동생 김명시(金命時)와 남동생 김형윤(金炯潤)도 당대의 유명한 공산주의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열 네 살에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자금 부족으로 1학년 1학기만을 마치고 상점 점원 또는 부두 노동에 종사했다. 마산창고회사가 설립되자 사무원(서기)으로 5년간 근무하다가 직원 정리로 말미암아 실직했다.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마산청년회와 마산해륙운수조합 등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1923년 8월에 결성된 마산의 사회주의 사상단체 혜성사(彗星社)의 회원이 되었다.

김상주(金尙珠), 팽삼진(彭三珍), 윤열(尹烈) 등과 함께 넷이서 사각동맹(四角同盟)이란 공산주의 연구기관을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겉으로는 납량문고라 부르면서 실제로는 공산주의 서적을 수집, 탐독하였다. 1924년 8월경 고려공청 중앙총국과 관계를 맺고 마산공산당과 마산공산청년회 결성에 참가했다.

1925년 4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즈음해 경남 지역의 사회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경남 사회주의 사상단체 동인회(同人會)의 마산지역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8월 조선공산당 마산야체이까에 배속되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 마산 제2 야체이까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9월 마산노농동우회 집행위원(교무부)으로 선정되었고, 12월에는 마산청년회연합회 상무집행위원(총무부)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마산경찰서에 한때 검거되었으나 곧 풀려나 김상주(金尙珠) 후임의 고려공산청년회 마산 책임자로 되었다.

1926년 초부터 『조선일보』 마산지국을 경영하면서 3월 마산기자단 집행위원, 마산노동연맹 발기 준비위원이 되었다. 5월에는 경남기자동맹 상무위원으로 김해교육회 분쟁사건 조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마산노동회에서 발행하는 벽신문(壁新聞) 『첫소리』의 통신부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혁명운동의 희생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김명규(金明奎) 등과 마산에서 모쁠(혁명후원회)을 조직하고 적립금을 모아 마산 부근의 혁명운동 관련 희생자 조사, ‘6월운동’ 관련 검거자 내사, 진해 반기독교운동 희생자 가족 생활상태 조사 등을 행하였다.

1926년 8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을 피해 중국 상해(上海)를 거쳐 광동(廣東)으로 망명했다. 1927년 1월 광동의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했다가 얼마 안되어 상해로 왔다.

1928년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강소성(江蘇省) 상해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9년 6월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10월 구연흠(具然欽), 홍남표(洪南杓)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를 해체한 뒤 새로이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유호한인독립운동자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총무부장이 되었으며 기관지 『앞으로』를 발행하였다.

1930년 7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 및 상해의 모든 단체와 관계를 끊고 김단야(金丹冶)와 제휴해 코민테른 동양부 산하 조선문제 뜨로이까의 조직에 배속되어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에 종사했다.

1931년 2월 서울로 돌아와 상해와 연락관계를 수립하고 노동자 농민에게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교양에 대한 내용을 담은 격문과 팜플렛을 배포하였다. 1932년 5월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상해로 갔다가 8월 귀국하였다.

11월부터는 서울, 인천 등 각지에 『코뮤니스트』 배포망을 조직하고 그 배포망을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다. 김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던 중 1933년 7월 영등포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4년 12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예방구금되었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출옥한 뒤 건국준비위원회에 참가해 교통부 위원이 되었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 경제부장 대리로 선정되었으며,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해 조직국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조선공산당 대의원으로 참가하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조공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 당 중앙위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해 당대회의 즉각 소집 반대를 주장하였다.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에서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50년 9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중 월북하다가 미군의 폭격을 받아 사망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6)
『남로당연구』 3-자료편(김남식, 198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Ⅰ·Ⅱ-(김준엽·김창순 공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79·1980)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호(1935.3)
『現代史資料』 29(姜德相·梶村秀樹)
집필자
박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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