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03년 원흥중학교(源興中學校)를 졸업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육군통역으로 복무하면서 통역, 우편검열 및 인부 감독, 탄약 및 군량 호송, 정보수집 등의 활동을 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08년 2월 일본정부로부터 훈8등 서보장과 은사금 70원을 받았다. 1907년 4월 함남 경성농공은행(鏡城農工銀行) 원산출장소, 8월 함흥농공은행 원산지점, 1907년 11월 대한제국 탁지부에 발탁되어 1908년 1월 재무감독국 주사로서 원산재무감독국에 근무했다.
1910년 조선총독부 함경남도 세무과 서기, 1914년 3월 조선총독부 군수에 임명되었다. 일본의 와세다 대학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교외생 자격으로 1909년에 법률과를, 다시 1921년에 정치경제과를 수료했다. 1914년 3월 함남 풍산군수를 시작으로 1917년 정평군수, 1922년 안변군수 등 10년간 조선총독부 군수로 재직했으며, 1925년 4월 덕원금융조합장 겸 사립 덕성학교장을 지냈다. 1930년 4월 함경남도 도평의회 의원(민선)에 선출, 재임 중이던 1930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32년 2월 함경남도 참여관, 1933년 4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산업부장) 등을 역임했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 황해도지사에 임명, 재직 중 1939년 12월 21일 사망했다.
황해도지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찬양하고 '내선일체의 정신으로 군수물자와 금품을 헌납하는 것이 일본에 애국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성된 '애국기 기증운동'에 부응하여 황해도민을 대상으로 두 차례에 걸쳐 약 10만원을 모금하고, 이를 일본 육군과 해군에 각각 비행기 제작 기금으로 헌납했다. 사망 직후 일본정부는 강필성에게 훈3등 서보장을 수여하고 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로 승서했다.
강필성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72∼18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