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신간회 목포지회 대의원,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정치부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30년 7월 6일
출생지
전라남도 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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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신간회 목포지회 대의원,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 정치부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원적은 전라남도 목포.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졸업했으며 재학 중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23년 7월 한 달 동안 조선청년회연합회와 동아일보사의 후원 아래 한위건, 이여성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학우회 제3회 하기 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귀국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운동의 기조’, ‘현대사회의 근본적 결함’ 등의 제목으로 강연했다.

1925년 1월 도쿄[東京]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 결성에 참가해 기관지 『사상운동(思想運動)』 발행을 위한 편집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4월 김웅성(金熊星)이란 가명으로 『사상운동』 130여 부를 가지고 부산을 통해 귀국하다 일제 경찰에 한 때 체포되었다. 8월  전라남도 목포에서 배치문·서병인 등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단체 목포 전위동맹(木浦前衛同盟)을 조직하였다.

9월 목포무산청년회를 개편하고 무목노농연맹(務木勞農聯盟)을 조직했으며, 전위동맹원들과 함께 10여 개의 직업별 노동조합 결성을 이끌었다. 10월 목포노동총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1월 목포제유공(木浦製油工) 동맹파업이 발생하자 목포노동총동맹 간부들과 함께 파업지도부를 구성했으며 일본인 자본가의 반성을 촉구하는 ‘제유쟁의비판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3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로 압송되는 중에 자동차 안에서 ‘노동자 만세’를 부르며 노동자 탄압에 적극 저항하였다.

1926년 9월 이후 일월회 회원들이 국내로 들어와 정우회에 가입할 때 동참했고, 11월 안광천과 함께 상무집행위원회의 서무부 위원이 되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언론을 통해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방향전환을 주장하면서 목포지역으로 내려가 조선공산당 활동을 전개하였다.

3월 목포청년회 임시총회에서 방향전환을 주도하며 ‘좌익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협동전선을 촉성하고 민족적 단일의 기치 아래 적극적으로 정치운동의 전위대가 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신간회를 대표적인 민족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이를 후원해 민족적 단일당으로 완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7년 5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에 조선공산당 엠엘파(ML派) 진영으로 참가해 본 협의회을 ‘비상설(非常設)’ 즉 임시회합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협의회의 의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일반정세 보고, 조선무산계급투쟁의 전반적 전개, 파쟁청산, 전민족적단일당 건설, 전국적 정치신문 발행, 전국적 조사기관 설치 등 11개 내용을 포함하는 의안을 작성하였다.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하다가 목포로 내려가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차 정기대회에서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928년 2월 일제 경찰에 의한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사건을 피해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3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만주에서 활동했다. 8월경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코민테른에 조선공산당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1928년 12월 코민테른에서 조선공산당의 재건설에 대한 결정을 내리자 1929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김규열·김영만·김철수 등과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로 결의하였다.

1929년 3월경 중국 길림(吉林)에서 서울-상해파 합동으로 조직된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해 정치부위원이 되었다. 10월에는 중국 연길에서 개최된 ‘재동만공산주의선인열성자대회’에 재건설준비위원회 대표로 참석해 본 대회를 지도하였다.

이후 코민테른에서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를 제기해 재건설준비위원회가 국내로 이동하자 만주에서 재건설준비위원회의 연락을 담당했다. 1930년 7월 코민테른에서 재건설준비위원회는 ‘파벌적 색채가 농후하므로 해체’할 것을 결의하자 이 내용을 함경남도 김일수(金一洙)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급성폐결핵으로 길림성 연길현 숭례향(崇禮鄕)에서 요양하다가 7월 6일 사망했다.

저술활동

주요 논문으로는 「조선사회운동의 신기운에 임하야」(『사상운동』 창간호, 1925.3), 「전환기에 직면한 조선신흥운동」(『동아일보』 1927.2), 「현하의 국제정세와 전쟁의 위기」(『조선지광』 1927.11)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창작과비평사, 1996)
『조선공산당사』-비록-(이창주 편역, 명지대학교출판부, 1996)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Ⅰ·Ⅱ-(김준엽·김창순 공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 보고서』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시대일보(時代日報)』
『중외일보(中外日報)』
집필자
박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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