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빈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충청북도지사, 고등관1등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伊藤泰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6년(고종 23) 9월
사망 연도
미상
본관
파평(坡平)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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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강원도지사, 충청북도지사, 고등관1등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86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03년 관립일어학교를 졸업, 외국어학교 부교관 및 일어교관 임명, 1910년 2월 대한제국 관세국 촉탁에 임명,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 고원(雇員)이 되었다. 1912년 6월 경기도 도서기, 1917년부터 1919년까지 도서기로서 장관관방 도서기를 겸했다. 1921년 경기도 도이사관이 되어 권업과장에 임명, 1922년 경기도 상공과장, 1925년 산업과장을 거쳐 1930년 도사무관이 되어 함경남도 재무부장, 1932년 충청남도 내무부장, 1935년 경기도 참여관으로서 산업부장을 겸했다.

1939년에는 고등관 2등, 강원도지사, 1940년 충청북도지사로 재직하다 1942년 10월 약 22년간의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고위관료직에서 물러났다. 충청북도지사 재임 중이던 1942년 고등관 1등 및 조선귀족의 예우에 준하는 종4위에 올랐고, 퇴임 무렵 일본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 및 정4위로 승위되었다. 경기도 참여관 재직 중 1936년 1월 『매일신보』를 통해 일본 황실을 찬양하고 조선총독부의 시정방침을 선전했다. 1938년 9월에는 경기도 산업부장으로서 『매일신보』에 중국 침략전쟁과 관련하여 병참기지 및 전진기지로서의 경기도의 사명을 강조했고, 1939년 1월에는 같은 신문에 경기도민으로 하여금 내선일체의 정신으로 침략전쟁에 참여한 일본군을 격려하고 국가총력전을 위한 국책수행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다. 충청북도지사로 재임중이던 1941년 3월과 1942년 1월에는 『조광(朝光)』과 『매일신보』에 각각 일제의 침략전쟁 지원을 위한 국민총력운동에 충성하고 '황국신민됨을 자각'할 것을 주장하었다.

중일전쟁 이후 1938년 7월부터 1942년까지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지냈다. 도지사 퇴임 이후 1944년에는조선총독부의 전시물자 통제기구의 하나로 설립된 조선중요물자영단 감사로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광복 직전까지도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이 외에도 1933년 10월 조선신궁 설치 1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결성된 조선신궁봉찬회(朝鮮神宮奉讚會)의 평의원, 1934년 4월 군·관 중심의 군국주의적 성격을 갖는 외곽단체인 충남국방의회연합회 상무이사를 지냈고, 1937년 1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사회교화방송 상식강좌의 강사로 활동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침략전쟁에 참여한 일본군의 원호단체인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회에 참석하여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또한 방공사상 및 국방사상을 강화하고 일본정신을 앙양시킬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방공협회의 지방 조직, 즉 1938년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939년 5월 조선방공협회 강원도연합지부장, 1940년 조선방공협회 충청북도연합지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1939년 11월에는 치안유지를 내세우며 반일 움직임을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경방협회 강원도연합지부장 자격으로 강릉소방조 공적상 표창기 전달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비하하기도 했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 석방되었으며, 1950년 8월 6·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윤태빈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47∼47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국민총력조선연맹원명부(國民總力朝鮮聯盟役員名簿)』(국민총력조선연맹, 1944)
『조선인관계잡건: 국민총력조선연맹관계(朝鮮人關係雜件-國民總力朝鮮聯盟盟(元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關係)』(일본척식성, 1939)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포창자명감』(1935)
『조선신궁봉찬회 취지서·회칙·사업계획서』(조선신궁봉찬회, 1933)
『조선신사록(朝鮮神士錄)』(1931)
『경성일보(京城日報)』
『대한제국 관보(大韓帝國官報)』
『동아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사상휘보(思想彙報)』
『조광(朝光)』
『조선경방(朝鮮警防)』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중외일보』
『총동원(總動員)』
『황성신문(皇城新聞)』
집필자
박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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