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생했다. 1911년 충청북도 청풍군 군서기, 1919년까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도서기를 차례로 지냈다. 1920년 1월 경상북도 고등경찰과 경부(警部), 1923년 8월 경상북도 경찰부 형사과장, 보안과장, 1925년 2월 도경시로 승진했다. 1926년 10월 조선총독부 군수로 발령받고 평안북도 운산군수에 임명, 1930년 박천군수, 1931년 강계군수· 용천군수, 1935년 의주군수 등 1939년까지 평안북도 지역의 군수를 역임했다. 1939년 5월 황해도 참여관 겸 도사무관으로 산업부장이 되어 황해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황해도농회 회장 등을 겸직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평안북도 의주군수와 황해도 참여관으로 재직 당시 각종 군수물자 공출, 국방헌금 및 애국기 헌납자금 모집, 시국강연회 등을 통한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0년 일본정부로부터 훈5등 쌍광욱일장(雙光旭日章)을 받았다. 1941년 5월 충청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어 충청북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 충청북도 임금위원회 위원 및 방공위원회 위원 등을 겸직했다. 1942년 12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이 되어 전라남도 임금위원회 위원,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 등을 겸직하였다. 1943년 9월 중추원 참의가 되고, 그해 10월 귀족의 예우를 받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3년 11월 사망했다.
김영배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15∼42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